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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 2일차에 다산초당을 관람하게 되었다.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시는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마을길을 따라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윤동환 전 강진군수가 저술한 목민심서와 다산정약용 책을 팔고 있지만 모두들 관심이 없는듯 지나친다. 숲속으로난 뿌리의길을 따라서 오솔길을 걷다보면 92개의 돌계단을 오르게 되고 계단의 마지막에 다산초당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옛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8년 강진 다산 유적 보존회가 현재의 건물을 중건한 것이다. 5칸 도리 단층 기와집으로 측면 2칸은 뒷쪽 거실이며 앞이 마루로 된 소박한 남향집인데 처마밑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다산초당" 이라는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

 

 

다산초당에는 다산4경이라는 볼거리가 있는데, 초당서편 뒤쪽에는 해배를 앞두고 선생께서 직접 "정석" 이란 글씨를 새긴 정석바위가있다. 그리고 초당 옆에 연못에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가운데 조그만 봉을 쌓아 만든 연지석가산이란 작은 연못, 초당 뒤편에, 다산 선생께서 직접 수맥을 잡아 만들었다는 약천이란 샘물, 마당앞에 놓여있는 평평한 돌로 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란 뜻을 가진 다조가 있다.


 

동암에서 조금 올라가면 천일각이 있는데,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정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이라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손이 닿을듯이 가까이 보이는 강진만의 푸른바다가 한눈에 조망된다.

 

 

천일각 바로 옆에는 숲속으로 오솔길이 개설되어 있는데, 이길은 다산 정약용선생이 가끔씩 말동무를 찾아서 산넘어 백사 혜장선사를 만나러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다산초당의 본 건물을 중심으로  동암은 동쪽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동암의 오른쪽 다산동암이란 현판에 판각된 글씨는 다산 정약용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된것이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서암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등 관직을 맡았으나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후 다산은 1818년 57세로 강진에서 유배가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가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그의 독백서를 보면 고향에 가서도 다산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좀더 쉽게 이해하려면 다산유물전시관에서 그의 일대기를 돌아보고, 다산초당에서 그의 숨결을 느껴보는것도 좋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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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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