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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물이든지 나름대로의 중요성은 다있지만 역사적인 소중한 기록이 되어 있다는걸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오랫동안 사용하던 석비가 국보급 문화제가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석비가 발견될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있었다.석비는 이지역의 관심있는 동호회에서 학계에 알렸고,비문의 내용을 단국대 학술조사단에서 분석하여 고구려비라는 확신을 가지고 1981년 3월 18일에 국보 제 205호로 지정받고 보호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구려비라고 입증하게 된이유는?

첫째: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둘째:전부대사자,제위,대사자,등 고구려 관직명이 명시되어 있었다.

셋째: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등의 글자가 보였다.

넷째:모인삼백,신라토내,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다섯째:삼국사기에는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기록되었다.

 국보 제205호인 중원고구려비가 이렇게 가까이 접할수 있다는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우연히 지방도를 따라서 가던중 안내 표지판을 보고나서, 자세한 역사적인 근거자료를 세밀이 읽어보고 나서야 중요성을 더욱 알게 되었다.소재지는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이며 충주호를 따라서 내려가는 지방도로에 인접해있어서 쉽게 찾을수 있었다.

중원고구려비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서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국내,외에 현존하는 고구려비는 현 길림성 집안시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뿐인데 이비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크다.이비는 마모된 부분이 많아서 전체 내용을 완벽하게 알아낼수는 없지만 삼국시대의 역사를 살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로 예서풍의 글자를 1면에 모두 새긴 대략 400여자의 비로 추정된다.

"오월에 고려태왕의 상왕공은 신라매금을 ㅁ하고 ,대대로 형제처럼 위와 아래를 서로알고,하늘을 지킬 것을 원하여 동래하였다.매금ㅁ와 태자공이 ㅁ하여(태왕에게) ㅁ를 원하였고 (태왕은) 나란히 바라보고 (신라매금에게) ㅁ적추를 내렸다. (태왕이) 교하여 마당에서 연회를 차렸는데, (그때 태왕이) 매금의 의복을 하사하고, (궤영을) 건립하는데 수고가 많았던 사람들에게도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 하사(허락) 하였으며,따라서 (함께).....하며.....노객들에게 ...하고,여러 고구려 관인들에게 교하여 (노객인의) 상하(직위를 가진사람) 들에게 의복을 내리게 하였다. (태왕이) 교하여 동이매금을 불러 되돌아오게 하고, 그 때 교하여 매금토내의 여러 ㅁ인ㅁ, 또 함께 태왕국토의 대위제의의 상하(의 직위를 가진사람들)에게 의복을 하사하였고 ,그들은 교를 받아 영에 꿇어앉았다.십이월이십삼일 갑인에 동이 매금의 신하들은 우벌성에 이르렀다.(태왕이( 교하여 전부태사자다우환노.주부귀ㅁㅁㅁ경ㅁ 등을 오게하고,사람 삼백명을 모으게 하였다.신라토내당주인 하부발위사자보노.ㅁㅁ노.ㅁㅁㅁ개노 등이 함께 ㅁ하여 사람을 모았고 신라토내중인은 ...를 기록하였다.가공군이 우..에 이르러..모(우)성 고모루 성수사인 하부대형야 ㅁ를..했다."라고 쓰여져 있다.

중원고구려비를 보호하고있는 보호각에는 입구의 현판에 이비석이 고구려비라는 입증근거와,보호각을 설립하게된 사유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서 이해하기쉽게 조목조목 써있었으며,이보호각은 1981년 3월 18일에 국보 205호로 지정을 받고 중원군에서 4천만원을 투입하여 그해 8월에 보호각을 세웠다고 기록되고 있었다.

 주변은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교통과 육로 교통상 전략적 중요지점으로 바로 뒷산에 장미산성이 있고 여기서 약8km정도 더가면 봉황리 마애불상군의 있다,노은면에서 고구려 시대의 금동광배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차지한 후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지역을 국원이라 이름한 뒤 장차 남방 진출의 거점이 될 이곳에 기념비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문을 번역되어 있었으나, 비문에 글자가 훼손되어서 알수 없는것은 ㅁ로 표기하고 있었는데 그당시 용어들이라 조금 이해가 어려웠다.하지만 역사적인 학자가 아닌 대부분 사람들이 이글의 중요한 뜻을 어찌 다 알겠냐만은...........소중한 역사적 가치가있는 국보가 자칫하면 영원히 아낙네들의 빨래판으로 전락할뻔 했지만, 그래도 우물가 빨래터에서 벗어나서 보호각으로 모셔진 것 만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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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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