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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여행 1일차 일정은 제일 먼저 남해대교를 건너서 남해대교의 좌측으로 보이는 노량해협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남해대교도 조망하고 해협에 전시된 거북선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두번째로 찾아간곳이 남해 충렬사였다. 남해 충렬사는 관음포에서 순국하신 이충무공의 시신이 아산으로 옮겨지기 전 임시 안치했던곳이다.

 

남해 충렬사는 남해대교 아랫쪽 노량해협과 연결된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으로 내려오면 ㄱ자형 건물이 보이는데, 우측에는 관리실과 좌측에는 화장실로 이용된다.

그리고 건물 좌측의 공간을 이용하여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남해 충렬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자암 김구 비가 세워져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선생이 떠올라서 잠시 혼선이 오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조선 전기의 주자학자이며 서예가로 기묘사화때 남해에서 13년간 유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암 김구 비 바로 옆에는 삼도통제사 이태상 비가 세워져 있다.

이태상은 별시 병과에 급제한 무관으로, 진주병마사로 재직중에 충렬사를 참배하고 청해루를 세웠다.

이충무공의 전공을 기리고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 준 선정을 칭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자암 김구 비와 삼도통제사 이태상 비를 잠시 둘러보고나서 조금 걷다보면 충렬사가 보인다.

남해대교 아래 노량포구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남해 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계단을 올라서면 외삼문이 있고 우측 앞에 귀부와 이수를 갖춘 한글비가 세워져 있다.

“도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라는 글씨는 정인보가 짓고 김충현이 썼다.

우측으로 청해루라는 현판을 단 건물은 충무공의 11대손인 이민봉이 1925년에 지었다고 한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쪽 방향의 계단 위에 내삼문이 자리하고 있다.

내삼문을 중심으로 다시 담장을 둘러 사우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운데에 신도를 두고 좌우 오르고 내려오는 계단을 같은 계를 두었다.

 

 

1726년에 이곳에 노량서원을 세웠는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철거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향사 윤기섭과 고준홍 등이 모여 조직한 ‘보존회’의 기금으로 사우를 건립했다.

이들이 사재를 털어 모은 자금으로 사당을 새로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내삼문과 가까이 비각이 있다.

비각은 살창을 세워 비를 볼 수 있도록 하였고, '補天浴日' 현판이 걸려있다.

이 글은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 참배하고 친필로 쓴 글이라고 한다.

 

 

그리고 충렬사 사당 바로 앞쪽의 좌측에는 충민공 비가 우측에는 충무공 비가 있다.

 충민공비는 조정에서는 1643년에 이순신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기전에 세워졌던 비석이다.

그리고 시호를 받고나서 충무공 비가 나중에 세워졌다고 한다.

 

 

충렬사 사당에는 가장 먼저 띄이는것은 정중앙에 위패가 보인다.

그리고 위패의 위쪽으로 자그마한 영정이 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커다란 노량해전도가 배치되어 있다.

 

 

사당의 뒷편에는 또 하나의 담장이 둘러쳐진 후원이 보인다.

이곳은 이순신장군이 관음포에서 순국하신후 아산으로 옮겨가기전 3개월정도 안치되었던 곳이라한다.

바로 그자리에는 아직도 가분묘가 조성되어 있었다.

 

 

남해안 여행을 다니다보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사당과 동상등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남해는 최후의 격전지이며 순국후 안치되었던 곳이라 더욱 경건한 마음이 드는곳이다. 그리고 아산지역에서 현충사와 이충무공의 묘소를 이미 둘러보았기에 이순신장군의 발자취를 더욱 고스란히 느껴보게된 여행이였다.

 

남해여행 제 3편은 이충무공의 유적이 있는 이순신순국공원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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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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