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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다녀오는길에 우연찮게 한용운선생 생가지라는 도로표지판을 보고서 따라가 보았다.한용운선생 이름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있는 분이라서 더욱더 호감이간다. 그렇게 명성을 떨친 분이 이곳 홍성에 생가지가 있다는것은 오늘에야 알게되었다.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이고 시인인 만해 한용운생은 고종 16년 (1879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나서,어릴적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6세에 방랑하여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후 다시 1905년 인제의 백담사에가서 연곡을 스승으로 모시고 승려가 되었다.1908년 전국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종무원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으며 1919년 3.1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작성하였으며,1926년 시집 "님의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일깨우려고 노력하였다.



입구에 들어서자 안내표지판이 안내를 하고있었다.
우측으로는 만해 체험관 뒤쪽으로는 한용운선생 생가지가 있고 조금더 올라가면 사당이 있다.

 주차장 입구에 새워진 한용운선생 생가지 안내표지판

 주차장의 뒤쪽으로 계단길을 올라서니 넓은 공원이 있으며, 우측으로 "나루 ㅅ배와 행인" 시비가있다.

 공원의 우측으로 나룻배와 행인이란 시비 옆에 선생의 생가지 성역화 기념비가 있다.

 공원의 좌측에 새워진 공약3장의 문구가 새겨진 비 

 공원의 우측 뒤쪽으로 시비공원 입구쪽에 새워진 어록비

 잔디밭공원을 지나서 울창한 송림으로 올라가면 민족시비공원에는 민족시인 20명의 시비가 새워져있다. 

 민족시비공원의 중간쯤에는 시를 감상하다가 잠시 쉴수있는 만해정이 있다.

 민족시비공원 우측에 만해 한용운 사당을 들어가는 솟을 대문이 새워져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사당에는 만해 한용운선생의 영정사진이 보인다.
사당의 문앞에서 영정을 향하여 잠시 묵념을 하며 님의 거룩한 뜻을 잠시나마 기려보았다. 

 사당의 앞쪽으로 선생의 생가는 앞면3칸 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만해 윤법대전이라는 현판이 안방의 방문위에 걸려있다. 

 안방문 좌측에는 만해 한용운선생의 대표적인 저서인 님의침묵의 대형액자가 걸려있으며,
바로 앞쪽으로 작은 협탁에 방명록이 놓여져 있어서 방명록에 서명하고 여기저기 집안을 둘려보았다.

 웃방에 우측벽에 걸려있는 대형액자  

 생가 앞쪽으로 부속건물이 하나있는데 관리실이란 간판이 보였다.

 만해 체험관에는 각종 유품과 유물이 전시되어있고 영상실과 전시 체험실이 있다. 

 만해 체험관 입구에 새겨진 흉상 

 만해 체험관 안쪽 전시실에 선생의 모습은 살아있는듯한  정중한 모습이 보였다. 

한용운선생은 1919년 33인의 민족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엿고,명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후 경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같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였으며 ,그의 일화로는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있을때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집을 지어 그의 대쪽같은 지조를 확인할수 있었다고한다.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불교계의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만당사건으로 투옥되는등 수많은 고충을 겪으면서, 광복을 한해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66세의 일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서울 망우리에 안장되어 있다고한다.

 한용운선생의 생가지를 돌아보고 그의 거룩하신 일대기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고,저항문학에 앞장서서 민족혼을 일깨워 주고자하던, 선생의 저서인 "님의 침묵"의 글귀가 뇌리에서 아련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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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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