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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김좌진 장군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장군을 떠올릴 때 초인적인 힘과 용기, 결단성, 불굴의 투쟁정신, 국가와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일찍이 노비를 해방시켰다든가,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했다든지, 독립군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든지, 광복회 활동을 했다든지,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든지 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김좌진 장군의 생가를 답사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그의 큰업적 한두가지만 기억하고 있었지만 생가를 돌아보면서 장군의 많은 업적과 그의 일대기를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김좌진은 조선조 고종 27년(1890) 11월 24일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6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라던 그는 7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8세가 되던 해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남녀 노복에게 논과 밭을 나누어 주었으며, 호명학교를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 후 20세 때부터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는데, 1920년에는 청산리에서 약 1600여 명의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 연대병력 약 3300여 명을 살상함으로써 독립군 최대의 전과를 기록한 위인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있다.

 입구에 들어서서 좌측으로 그의 생가가 보이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행낭채와 안쪽에 안채 그리고 맞은편에 별채가 창고로 보이며 ㄷ자형으로 구성되어있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 놈이 왜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 버릴 길 없구나
단장지통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시비가 생가 가기 바로전에 보인다. 

 생가의 입구 오른쪽에는 마굿간과 농기구 창고건물이 별채로 있으며,
마굿간에는 모형이긴 하지만 장군이 타고 다니던 커다란 백마가 처다보고 있었다 

 생가입구에는 생가터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이 새워져있고 안쪽으로 ㄷ자 형태로 건물이 배치되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안채의 모습
좌측부터 부엌, 안방, 웃방, 대청마루, 서당등 1자 구조로 배열되어 있다. 

 마당에서 바라보이는 들어오는 대문이 있는 행낭채 주변에는 옛날 물건들이 보인다.

  안채의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은 창고(광)인듯 한데 빗장이 채워져있다. 

 마당가에 보이는 우물물 

 안방에 정면으로 보이는 태극기 배경의 김좌진장군의 초상화

 안방의 문위에 있는 이글은 가훈이듯 ? 

 대청마루 위쪽에 걸려있는 대형액자 ? 

 안채의 뒤안에서 보니까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독대가 보인다. 

 생가 우측 옆쪽에는 김좌진장군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 전시한 백야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백야 기념관 입구에 새워진 김좌진장군의 흉상

 백야 기념관을 돌아보고 뒤쪽으로 가파른 계단과 쪽문을 통해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기념관 뒤쪽으로 올라가서 널찍한 공원이 있는데,
공원이 이름은 백야공원으로 그의 생전에 업적을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대형 전시물들이 보인다. 

 백야공원내에 새워진 김좌진장군비 

 그의 영정을 모시고있는 백야사 가는 길목에는 그가 생전의 업적을 단계별로 기록해 놓은 동상들이 있다. 

 아래쪽에서 홍살문을 통과하면 화룡문이라는 대문이 보인다. 

 화룡문을 통과하면 청산문의 대문이 보이고, 

 청산문을 통과하니 김좌진 장군의 영정을 모신 백야사라는 사당이 나온다.

 백야사 옆쪽에는 와룡제라는 부속건물이 배치되어있다. 

김좌진 장군의  일컬어서 위에서 언급한 그것만으로 그를 논하는 것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그의 삶은 오직 민족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만주, 연해주, 국내로 왕래 무상한,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희생한 즉 대의를 추구한 일생을 보냈던 것이다. 죽음에 임박하였어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기고,평생에 나라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친 그가 광복을 보지 못한체 새상을 떠난 애틋한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백야 김좌진 장군, 그를 살해한 사람은 박상실이라는 고려공산당 소속의 한인청년이었다니 또 한번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유이다.우리가 위인들을 기억할때 그의 큰 업적하나정도로 기억하고 특별한 관심이 없는한 자세한 그의 일대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을것이다.기회가되어 장군의 생가를 돌아보면서 김좌진장군의 많은 일대기들의 자료들을 보면서 다시한번 그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다시한번 되새기며 숙연한 마음으로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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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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