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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되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와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 졌다고 한다.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에는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 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고문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을 처형시켰던 곳으로 김대건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내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서 있다. 바로 성문밖 도로변에는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자리개돌이 있으며, 많은 인원을 한줄로 엮어 한꺼번에 생매장 시키거나,물에 빠뜨려 수장시키기도 했다.이와 같이 많은 신도들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장소여서 1965년부터 성지조성운동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수만명의 성지순례 행렬이 이어지는 우리나라 최대의 순교성지로 알려져 있다.

 해미읍성의 정문으로 진남문이라 부른다.
화강암으로 잘다듬어진 아치형 홍예문이고, 건물은 팔각지붕으로 되어 되어 있으며
성종22년(1491) 대대적으로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남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성안에는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정면으로 거대한 회화나무가 있으며 멀리로 보이는 관아건물이 보인다. 

 300년생 회화나무로 이지역에서는 호야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100여년간 천주교도의 박해가 되면서 교도들을
이 해미읍성에서 처형했는데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 하였다고 한다.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남아 있는데,
이 회화나무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을 하였으며, 그 흔적으로 지금도 철사줄이 박혀있다.
뒤쪽으로 보이는 옥사에 갇혀 있던 신도들을 끌어 내어 회화나무 동편의 나무가지에 매달아 놓고 고문하였다.

 옥사의 안쪽으로 들어가보니, 내옥과 외옥으로 구분되어 있고
남녀 옥사가 구분되어 있으며 신도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고 투옥후 처형하였다 한다.
내부에는 큰칼을 목에 두르고 갇혀있는 신도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민속가옥  앞쪽 공터에는 널뛰기등 민속놀이를 재현하기 위한 도구들이 놓여있다. 

조선시대 말단관리인 서리의 집이다.
농촌민가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춘 가옥으로,전형적인 서산지역의 초가삼간을 재현하고 있다. 

 조선시대 민가로 상인의 집이다.
안채는 초가삼간이나 부속채가 딸려 있는것이 특징이며
장사가 주업이지만 주변의 텃밭등을 경작하는 농기구등이 비치되어 있다. 

 읍성의 동쪽으로 보이는 동문으로 잠양루라고 부른다. 

 정문에서 끝쪽으로 보이는 관아 건물의 앞쪽에는
거대한 고목이 한그루 서있고 옆쪽으로는 객사 건물이 보인다. 

 객사는 건물의 중앙청정에 '궐'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으며
양편 익실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 및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하여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을 행하던 건물이다. 

 동헌의 뒤쪽으로 배치된 부속건물로,
관아의 물품을 보관하고 출납 맡아보던 관리를 고자라 하였으며, 이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동헌의 담장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내아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은 동헌에 근무하는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건물로 그들의 살림집이다. 

 동헌을 나와서 우측으로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가면 청허정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병마절도사 조숙기가 세웠다고 한다. 

 읍성의 서문으로 자성루라고 한다.
현재는 동문과 서문을 폐쇄된 상태로 정문만을 통해 읍성에 들어갈수 있다. 

 읍성의 서문의 성곽위에서 내려다본 전체적인 배경이다. 

 서문에서 정문을 조망해본 풍경이다.
성곽이 안쪽에서 보면 흙으로 채워져 원만한 경사지만
성곽의 밖으로 내려다 보면 석축을 수직으로 5m 높이로 튼튼하게 쌓아 올려져 있다. 

 해미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읍성으로, 성의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이라고도 했다. 읍성이란 지방 행정 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며,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 형태로서, 평시에는 행정중심지가 되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가 되었다.

조선시대 해안지방에서 출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혀 온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석성으로 좋은 취지로 축성되어,
전국지명인 청주,충주,상주,공주,부여,서천,제주,연산,지명이 석축 돌에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인력이 전국에 차출되어축성되었으며, 충청도의 군사중심지로 군사권은 물론 내란방지 등 사회질서의 기능까지 담당하는 격이 높은 성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지역을 수호하고자하는 호국의지가 강한 해미읍성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서 천주교 박해의
현장으로 바뀌면서 수 많은 신자들이 처참하게 떼 죽음을 당하는 현장이 되었다니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수 없다.이곳의 회화나무를 처다보니,겨울바람에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마치 처형당한 원혼들의 비통한 원성이 들리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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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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