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요선정이란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법흥사 쪽에서 흘러내리는 법흥천 인근 절벽위에 있는 정자다. 邀僊(요선) 이라 쓴 글씨의 뜻은 신선을 맞이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요선정은 대대로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원세하, 곽태응, 이응호를 중심으로 하는 주민들이 힘을 모아 숙종, 영조, 정조 세 임금이 써준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하여 1913년에 세운 정자이다.
 
영월 땅에 세분 군왕의 어제어필시문이 내려진 것은 숙종 말년인 17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숙종대왕께서는 1446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승하하신 선대왕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종묘에 모시는 한편 노산 묘를 장능으로 추봉하는 등 조선 초기의 왕조애사를 바로 잡기위해 힘쓰신 분으로, 영월 유배길의 소상한 일들을 물어 살피시다가 1698년(숙종24) 정월에 "빙허, 청허양루시" 한수를 써서 당시 강원감사 심정보에게 내리니 어제어필 시문이 주천현루인 청허루에 간직되었다. 그러나 청허루에 화재가있어 어제시는 누대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그후 청허루를 중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대왕께서는 선왕의 시문을 먼저와 같이 그 자리에 보존하기 위해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손수 쓰고, 그 뒤에 다시 시 한편을 더 보태어 당시의 강원감사인 임집에게 내리니 새로 중건된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를 봉안하게 되었으나, 이 자랑스러운 두 누각은 오랜 세월속에 퇴락하여 마침내 무너졌고, 세 임금의 보묵은 민가에서 보존되니 이를 봉안하고자 무릉리에 요선정을 짓고 어제어필시문을 봉안하게 되었다한다.

요선정은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소재지에 있으며, 법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좌측으로 이정표가 있으며, 입구에는 "마애여래좌상봉안도량" 이라는 사자산 미륵암 표지판을 보고 따라 좁은 산모퉁이를 돌아서 들어가게 된다.

요선정 올라가는 길은 미륵사란 최근 생긴 절 마당에 차를 대고 5분가량 좁은 숲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아담한 정자가 보인다.  정자 옆 좌측으로는 수십미터의 절벽 위 커다란 바위엔 고려시대에 새긴 마애여래좌상과 작은 석탑이 보인다.

요선정은 불교 전성기인 통일 신라시대 철감국사 도윤과 징효대사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자산 기슭에 흥령선원을 개원하고 자주 이 곳에 와서 포교를 하던 곳으로 그 당시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라 한다. 또한 징효대사가 이 곳에서 열반했을 때에는 1천여개의 사리가 나왔다는 불교와 인연이 깊 은 곳으로 정자 주변에 마애여래좌상과 석탑 1기가 남아있다.  

요선정에는 두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邀僊(요선) 이란 쓴 글씨의 뜻은 신선을 맞이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또하나의慕聖(모성)이란 임금을 그리워 한다는 뜻을 가진 두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

요선정 안쪽에 봉안되어 있는 어제시는 두 틀 板額(판액)에 보존되어 있으며,그 중 하나에는 숙종대왕어제시와 영조대왕어제어필시를 담았고, 다른 한쪽에는 정조대왕의 친필서 문과 어제시를 담고 있다. 

 숙종대왕께서 지으신 시의 현판은 화재를 입었는데 무인년 고을을 지키던 신하가 중건하였음을 영조대왕께서 들으시고원편을 찾아 손수 쓰시고 서문을 지으시여 근신에게 명하여 달게하니 한 누각이 이루어지고 훼손되는데 따라 무겁고 가벼움이 있는게 아니라. 좋은 글과 글씨가 황홀하기만 하니 이 누는 이것으로 빛나고 그 고을의 산천 또한 이 누로 인해 빛나니 이누각이 이 고을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기와를 잇고 수리하는 일은 가히 힘쓸줄 믿으니 공경해서 시를 짓고 대략을 적어 그 곁에 달게 하노라> 하는 내용의 서문과 함께 정조대왕은 어제시 한편을 내려주셨다고한다.

또하나의 판액에는 정조대왕께서는 청허루에 봉안된 두 분 선왕의 어제시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경취주천현루소봉" 서를 지어 두분 선왕의 어제시옆 에 걸게 하니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주천은 옛 고을로 지금은 원주에 속해 있으며 청허와 빙허의 두 누각이 있는 경치좋은 곳 옛날 심정보목사가 있던 고을이다. 

요선정 우측으로 거대한 바위에는 "석명선" "정사이월태수행"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최초에 이곳에 새워져 있던 암자와 관련된 흔적으로 보인다.

 요선정 좌측에 있는 무릉리 마애불좌상의 뒤쪽에서 내려다 보면,수십미터의 낭떠러지 절벽위에 모진 새월 견디어온 소나무가 분제처럼 두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절벽 아래쪽으로는 법흥계곡에서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길이 보인다.

요선정 옆 바위 한면에 새겨 놓은 마애불좌상의 상체는 양각, 하체는 선각적이다.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 호로 지정되었으며,마애좌불상은 수백년 모진 비바람에 얼굴부분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머리위에는 넓은 석판이 가려주고 있다.

강원도 내 마애불상은 많지 않으며, 철원군 동송면에 있는 마애석불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된 예는 2구에 불과하다. 이 곳에 있는 마애불은 그 중의 하나로 얼굴은 양각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부분은 선각 으로 음각한 좌상이다. 상체는 길고 원만하지만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하체는 상체에 비해 크게 조각이 되어 조금 은 균형을 잃고 있는 모습이다.

두 손은 가슴에 표현하였는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있고, 왼손은 오른손에 평행이 되게 들고 있다. 밑으로 연꽃 문양의 대좌가 있어 그 위에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높이는 3.5m이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균형을 잃고 있으나 힘찬 기상이 잘 표현되어 있는 마애불상으로 옆에 있는 청석탑과 함께 고려 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릉리 요선정을 돌아보면서 문화제 41호인 요선정과, 유형문화제 74호 마애좌불상은 시대가 다르고 사연이 다르지만,통일신라 시대의 암자와 징효대사의 기록이 있는 그자리에,고려시대에 마애좌불상이 새겨지고 작은 석탑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체,그 공간을 이용하여 조선시대에 요선정을 건립하여 문화제가 잘 보존되고 있는것은 서로 공존하기 때문일것이다.

반응형

Posted by 털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