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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발길 닿는데로 두루 다니다보면, 때로는 그 지역에서 재미있는 설화도 들을 수 있다. 장마철이라 비가 오락가락하는 7월 중순에 길을 떠났다. 이곳은 요즘 저렴하게 한우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널리 알려진 "다하누촌"이 있는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다.
 
평창에서 제천으로 연결되는 82번 지방도를 따라서 나오다보면, 영월군 주천면 소재지에서 우측으로 보이는 다하누촌을 지나서 외곽도로에 주천2교를 건너가면, 마주보이는 작은산이 금산이라한다. 요즘은 다리가 놓여있지만, 예전에는 주천리에서 금산(신일리)을 가려면 큰강물을 건너가야했다.

주천2교를 건너 마주보이는 금산 자락을 지나가다보면, 도로변에서 의호총이라는 커다란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의호총이란 무었일까? 의로운 호랑이 무덤이란 뜻이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의로운 호랑이 설화를 새겨보면서 안내판 조감도를 따라서 의호총을 보기위해 금산자락으로 발길을 옮겼다.

▲ 주천2교 맞은편에 보이는 금산자락, 솔밭아래 의로운 호랑이 무덤이 보인다.

▲ 주천면 신일리 금산자락, 88번 지방도로변에서 의호총 안내도를 볼 수 있다.

▲ 義虎塚(의로운 호랑이 무덤) 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을 따라가 보자.

▲ 표지석을 따라서 100여미터 산길로 올라서면 상징물과 초막이 보인다.


의호총은, 호랑이와 함께 효자 금처사 설화가 깃들어 있는 곳으로, 지금부터 약 3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주천 금산 아래에는 금처사(본명 琴師夏)라는 학문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부친상을 당하자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시묘살이를 하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마저 갑자기 병이 나서 생명이 위급하다는 전갈이 왔다. 효자 금처사는 약을 지으려고 읍내인 주천강으로 건너가는 나루터로 달려갔다. 그러나 상류에서 쏟아진 폭우로 배를 건널 수 없게 되자 강 건너를 바라보며 크게 통곡을 하였다.

이때, 짙은 어둠 속에서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눈앞이 캄캄해진 금처사는 호랑이에게 "나는 지금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하여 강 건너 주천에 가서 약을 지어다 드려야 한다. 내가 어머니께 약을 지어드린 후에 나를 잡아먹던지, 마음대로 하여라," 라고 크게 호통을 쳤다.



그러나 호랑이는 고개를 숙인 채 꼬리를 흔들면서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한 후, 호랑이는 금처사를 태우고 거센 물결을 가르며 강을 건너 주었다. 그리고 호랑이는 어머니의 약을 지은 금처사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강물을 건너 주었으며, 어머니의 병환은 금처사의 지극한 효성으로 완치되었다.

그후 금처사는 다시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가 시묘를 살았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찾아와서 같이 밤을 지새웠다. 또한 1720년 6월 8일에 조선 19대 숙종임금이 승하하자 금처사는 주천 망산에 올라가 궁궐을 향하여 3년상을 지냈는데, 이때도 밤이 깊어지면 호랑이가 나타나 금처사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러나 애초롭게도 숙종 임금의 국상을 마친지 얼마 후, 호랑이는 늙고 병이든 나머지 금처사 집 마당에 와서 쓰러지자, 금처사는 호랑이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였으며, 호랑이가 죽자 고이 묻어 주고 매년 제사까지 지내주었다한다.

▲ 앞쪽에 비석이 새워진곳이 호랑이 무덤이고, 뒤쪽에 두개의 무덤은 금처사 부모 묘소다.

새월이 흘러, 호랑이가 죽은지 23년 후인 1743년에 강원도 관찰사를 보필하는 정 3품의 벼슬인 순영중군(巡營中軍)이 주천에 왔다가 이 호랑이의 충성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비석을 세워 주라는 분부를 하였고 그 비석이 바로 의호총비이다.

그 후 주천 사람들은 호랑이 무덤과 비석이 세워져 있는 이 산을 '금산'이라 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한 금처사와 호랑이 이야기를 후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금처사에게 신일리 금산 주위에 있는 사방 10리의 땅을 사패지로 하사하였으며, 그의 효행과 충성심을 기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매년 호랑이 묘에 제사를 올렸다한다.


비석 앞쪽은 의호총(義虎塚)이라 새겨져있고,
뒷면에는『癸亥七月日因巡營分付立故今處士師夏康熙子天崩有虎終喪三日而死』라 새겨져있다.

『1743년 계해 7월에 순영(조선조 정3품의 외관직으로 각도 관찰사를 보직하던 관원)의 분부에 의하여 세웠으며 , 금처사 사하가 1720년(康子)에 국상을 당하여 호랑이와 같이 3년상을 마쳤는데, 그 호랑이가 3일 후에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의호총을 만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새월이 지나 영월군에서는 의호총비에 새겨진 문구를 근거로삼아 금처사의 효행과 충성심, 그리고 의로운 호랑이를 기리기 위해 2003년 의호총비 옆에 초막과 호랑이상, 효자상을 세워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의로운 호랑이와 금처사의  효행심을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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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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