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여행을 하면서 한가지 두드러지게 띄이는 것은 고산윤선도의 유적지이다. 자세한 내용을 알리는 홍보책자가 없어서 그저 동천석실이라는 이정표만 보고 따라 갔더니 부용동 산자락 아래쪽 커다란 이정표가 있었는데,산쪽을 처다보니 산중턱에 돌출 되어있는 절벽이 보인다. 이곳은 고산윤선도가 말년에 머물렀던 부용동에서 제일 경치가 아름다운 동천석실로 그가 사망한지 300년이나 방치 되었다가 1993년에 복원 하였다 한다.
고산이 세속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신선처럼 자연에 동화되던 명소로서,전남 완도군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있는 곳이다. 동천석실은 아슬아슬한 절벽위에 세운 한칸짜리 정자로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처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으로 알려져 있는 동천석실(洞天石室)은 하늘과 통하는 산중의 방 이란 뜻이다.부용동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있는 곳에 정자를 설치해 놓고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던 곳이었다.



세연정을 지나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니 낙서재,동천석실 주차장이라는 이정표가 있어고,
좌측 산길로 올라가면 낙서재와 곡수당이 있고 우측 도로변에 동천석실이라는 커다란 이정표가 보인다. 

 

우측으로 산중턱에 돌출된 절벽위에 거대한 바위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거리가 멀어서 희미하게 보이기에 줌으로 바싹 당겨 찍어 보았더니 절벽위에는 자그마한 정자각이 보였다.

 소하천 다리를 건너서 산길에 접어드니 빼곡하게 우거진 숲속으로 험한 산길로,
약15분쯤 걸어 올라 가면서 이마에 땀방울을 훔칠 정도 였으니 약1km는 넘는듯 싶었다. 

 숲속길이 열리면서 우측으로 돌출된 거대한 바위들이 쌓여있는 절벽위에 작은 정자각이 보인다.
그런데 올라가는 입구가 어딘지 도대체 알수가 없었다.
전체가 암반이고 거대한 바위인데 올라가도록 돌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억지로 바위에 손바닥으로 짚고 매달려서 올라갈수 있었다. 

 

 동천석실의 절벽 아래에는 석문.석담.석천.석목.석대 및 회황교등의 유적이 있다 .
고산이 다도를 즐기던 오목하게 파인 차바위,바위 사이사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받는 작은 석지와 연지,한 사람만이 거닐 수 있는 회황교와 돌계단,석문 등 자연 그대로의 모양에 따라 여러 바위에 상징적인 이름을 붙여져 있다.

 작은 연못을 지나 마주보이는 절벽쪽으로 올라가보려고 시도 했는데 워낙에 경사가 심해서 실패했다. 

 방향을 바꾸어서 앞쪽으로 억지로 커다란 바위를 넘어서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그래도 커다란 바위를 손바닥으로 짚어가면서 넘어서니 그나마 작은 소로가 보였다. 

 드디어 정자각까지 올라서서 전체적인 정자각을 찍어 보려하니 화면에 다 잡히지 않네요. 

 정자각 주변이 워낙에 협소하여 사방을 둘러보아도 전체적인 윤곽을 화면에 담기가 쉽지 않았다. 

 아랫쪽을 기준으로 우측 바위에 올라가서 그런데로 한컷 화면에 담을수 있었다. 

 뒤쪽을 보니까 큰 바위돌이 가려서 전혀 공간이 없고 지붕끝이 바위에 닿는듯 하였다. 

 반대쪽으로 돌아가 보아도 온통 바위절벽이 애워싸고 있다. 

 이렇게 좁은 공간을 꽉채우고 정자각 하나 달랑지어 놓고 이곳에서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보면서 책읽기를 즐기고 글을 썼다니 취미한번 고상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앞뜰에는 그래도 두사람 정도는 서있을 정도의 공간은 있어서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있으며,
좌측에 새워놓은 뽀족한 바위돌 끝쪽으로 그가 주로 은거생활을 하던 곡수당과 낙서재 건물이 아련히 보인다.
고산윤선도는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적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세상을 등지고자 제주도로 향하던 중 풍랑으로 보길도의 황원포에 상륙했다가 보길도의 풍경에 반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상이 물려준 재산으로 부용동에 자신만의 낙원을 꾸미고 낙서재에서 학문을 익히며 동천석실과, 놀이공간인 세연정 등을 꾸며놓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을 하면서,조선시가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어부사시가등을 남겼다.

그러나 동천석실을 돌아보면서 필자가 느낀점은 조선시대 재력가인 그가,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글읽기와 글쓰기를 즐기면서 신선처럼 살수는 있었지만, 아랫마을에서 이곳까지 그를 모시고 보필하던  많은사람들은 오랜 새월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수 없었다.



Posted by 털보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