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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의 좋은 형제'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신분들이 있을겁니다.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대부분 중년의 나이가 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필자도 국어 교과서에서 굵게 써있는 한글을 읽으면서, 정말로 이렇게 의좋은 형제가 있을까? 하는 정도로 마음깊이 새겨 두었기에 수십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련하게 그 이야기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던 지난 주말 봄빛이 따사로운 오후, 집안에 있기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카메라 둘러 메고 발길 닿는데로 떠난곳이 충남 예산지역이였습니다. 예산하면 널리 알려지 예당저수지를 끼고 짙어만가는 봄을 느끼면서 한바퀴 일주하다가, 대흥면 일대에서 우연히 '의 좋은 형제' 비 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수십년지난 아련한 기억속에 볼수 있었던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를 다시금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의 좋은 형제의 이야기를 전개해 보겠습니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현재 대흥면사무소옆에는 연산군때 세워진 이성만 형제 효제비가 있습니다. 원래 이비는 가방교 옆에 서 있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길 위기에 놓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대흥호장 이성만, 이순 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자로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성만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고, 순 은 아버지의 묘소를 지켰다. 3년의 복제를 마치고도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1497년 연산군3년에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이 비를 건립 하였다고 합니다.

이 비는 1978년,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무대였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가방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예당저수지로 인한 수몰 위험이 있어, 현 위치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이 비가 발견되어 의좋은 형제 전설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효재비 발견후 철저한 현장 조사와 탁본을 토대로 작성한 비문에 따른 번역문입니다. 판독된 비문은 이두, 속자, 고자, 첩자기호등을 포함하여 글자 수가 171자 이며 번역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락 16년(1418,세종 즉위년 11월 3일) ,지신사 하연이 삼가 왕지을 받들어 (의리가 있는 남자와 절개가 있은 여자 효성스런 아들과 손자를 찾아보고 보고할일) 각도로 공문서를 보낸 일이 있다. 충청도 대흥호장 이성만, 이순 등은 부모가 살아 계실적에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고, 봄과 가을로 부모가 사랑하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해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형은 어머님의 무덤을 지키고, 동생은 아버님의 무덤을 지키면서,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에 이르고, 저녁이는 아우가 형의 집에 나가되 아침과 저녁으로 서로 맞잡고 같이 밥을 먹었고, 한 가지 맛난 것은 얻으면 모이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고 임금께 상신을 올려 보고 드렸다. 앞서 효자 대흥호장 이성만, 이순 을 임금께서 궐내로 불러 정표문려하시고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심하고 삼가고 지켜서 가풍을 떨어뜨리지 말고 더욱더 힘스라 하시고, 영세토록 전하는 교훈이 되게 하셨다. 홍치 10년(1497, 연산 3년) 정사 2월에 세우고 표하다. 이렇게 적혀있다고 합니다.


1964년에 출판된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교과서 표지입니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지금 보니, 그 교과서 표지가 그대로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필자가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가 봅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형제가 의 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같은 논에 벼를 심어서 부지런히 가꾸게 됩니다. 한해동안 가꾸어서 누렇게 익은 벼를 바라보며, 이제 곧 수확을 해야 할것인데 하면서 대화를 합니다.

이튼날 이른 아침부터 형제는 벼를 베기시작합니다. 형님은 동쪽에서 아우는 서쪽에서 베면서 "누가 많이 베나 내기할까" 하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각자 열심히 벼를 베었습니다.

형제는 쉬지않고 열심히 벼를 베어서 어느덧 논이 훤하게 벌판이 되었습니다. 형님은 동쪽에 낟가리를 쌓아놓고, 동생은 서쪽에 낟가리를 쌓아 놓고서, 누가 많이 베었나 비교해 보았지만 둘은 똑같았습니다.

형제는 각각 한더미씩 나누어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동생이 생각해보니 형님댁은 식구가 많으니, 벼를 보내려고 생각하다가, 형님이 안받을것 같다는 생각에 몰래 드리려고 밤중에 형님 낟가리로 벼를 나르기 시작합니다.

이정도면 형님이 더 많겠지 하고 동생이 돌아왔지만, 형님도 똑같은 생각을 하게됩니다. 동생은 새살림을 시작했으니까 드는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동생에게 벼를 더 주기로 생각하고 밤중에 논으로 나갔습니다.


형님도 자기 벼를 열심히 동생의 낟가리로 옮겨서 쌓기 시작합니다. "이만하면 동생에게 도움이 되겠지" 하면서 형님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집으로 돌아 갑니다.

날이 밝아지자 동생이 논에 나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만큼 형님 낟가리에 옮겨 놓았는데 조금도 줄지 않았으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으로 돌아 옵니다. 형님도 나가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날밤 이번에는 형님이 먼저 나가서 동생의 낟가리로 벼를 잔득 옮겨 놓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형님이 돌아간뒤 이번에는 동생이 자기 벼를 형님 낟가리로 잔득 옮겨 놓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형님과 동생은 몰래 다시 논에 나가 보았지만 여전히 똑같이 쌓여있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형제는 똑같이 생각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까닭을 몰랐습니다. 그 날밤 형제는 또 밤중에 논으로 나가서 벼를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저쪽에서 누가 다가오니까 , 걸음을 멈추었을때 구름사이로 달님이 얼굴을 내밀자, 형제간에 얼굴을 보게되었습니다. 이제야 서로의 낟가리가 줄지 않았던 까닭을 알수 있었습니다. 형제는 서로 볏단을 내려놓고 달려들어 한참을 얼싸안고 형제간의 우애에 감동을 하게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1964년 2월에 처음 지었다는 내용과, 국어 2학년 2학기용이며, 문교부에서 지었고, 국정교과서 주식회사에서 펴내었다는 글자를 보니까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신세대들은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당시 상황이 연상이 안되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필자는 60년대에 초등학교에서 배운 국어 교과서를 다시 보면서, 당시의 농촌 현실과 비교했을때 그 장면들이 그대로 연상되어 감회가 깊었습니다. 형님은 아우를 위하는 마음과, 아우는 형님을 위하는 훈훈한 이야기, 물론 조선시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같은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당시 임금님이 직접 어명을 내려서, 감동적인  의 좋은 형제의 이야기를  세상에 널리 알려서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 일대에서 '의 좋은 형제' 이야기의 본거지를 돌아 보면서, 요즘 세상은 형제간의 의리 보다는 이권이 앞서는 각박한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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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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