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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유적지를 포스팅하면서 해남의 종가마을에 고산 윤선도선생의 유적지가있고 보길도에는 세연정과, 동천석실, 곡수당, 낙서재,의 유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번에 소개할 유적은 보길도 부용동에 자리한 세연정을 소개합니다. 세연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 이란 뜻으로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 한다.
 
 
보길도 부용동은 고산 윤선도선생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살던 유서 깊은 곳이다.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부용동의 아름다운 절승에 의탁하여 자기구제와 자유를 얻은곳이다.
부용동은 고산이 51세때 들어와 85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살면서 오우가, 산중신곡등 많은 가사와 유명 한 어부사시사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를 남겼다.

 세연정의 전체적인 조감도를 살펴보았다.
세연정은 자연과 인공을 교묘히 접합시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물과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하게 흐르는 인공지 한가운데 그림같은 집을짓고 신선처럼 지냈으니
시가 절로 읊어 질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곳은 세연정 북쪽에 돌담을 쌓아서 무대를 만들어 놓은 동대라고 하는데,
동대위에서 기녀들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고 관람을 하면서 여흥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리에 구불구불 가지를 드리운 여러 그루나무들이 우거져서 무희를 대신하고 있었다.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에는 서대라고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
동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모양이 나선형으로 3계단이 남아 있으며,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 행위를 했던 곳으로 춤을 추고 돌면서 무대에 오르도록 나선형 계단을 이뤘다. 

판석보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하고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세연지의 중앙부에는 세연정의 우아한 풍경을 보면서 주변에 우거진 숲길을 따라
산책로를 한바퀴 걷다보면 세연정에서 흘러나오는 어부사시사의 시가 구슬프게 들리고 있었다. 

어느 방향을 둘러 보아도 빼어난 환경의 세연정은 각각 사방의 정자각 이름을 달리 불렀으며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 호광루, 서쪽에 동하각,
남쪽에 낙기란 이란 편액을 걸었 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세연정을 둘러 싸고있는 인공지의 시원한 물길과 더불어 그주변에는 수백년생의 소나무가 우거저서
그늘을 만들어 주니 더욱 깊고 우아한 경관을 이루며 세연정에 걸터 앉아보니
한구절의 시가 절로 흘러 나왔다.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 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혹약암은 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중의 하나이다.
이 바위는 '혹약제연'이란 효사에서 따온말로, "뛸 듯 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세연지의 주변에는 그밖에도 많은 바위들이 각각의 모습으로 빼어난 경관에
보조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답사 당시는 가뭄으로 물이 깨끗하지 못해서 아쉬움을 더했다. 

 곡수당은 초당,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월하탄이 조성되어 고산이 휴식하던 장소 이다.
곡수당 옆에는 서재가 건립되어 고산의 아들들과 제자들이 살던 곳이다. 

 부용동 격자봉 아래에 있는 곡수당과 낙서재의 건물은 현재 복원 공사중에 있으며,
이곳에서 마주보이는 산중턱 절벽위에는 동천석실이 있다. 

현재 복원공사중에 있는 격자봉 아래에 위치한 낙서재 건물이다.
낙서재는 의미대로 독서를 즐기는(樂書) 곳이라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었다한다. 

 곡수당과 낙서재 건물이 보이는 앞 뜰에는 작은 연지가 복원되어 고산 윤선도선생은  이곳 보길도에 정착하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격자봉 아래 부용동의 낙서재와 곡수당을 지어서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산중 절벽위의 동천석실에서 조용하게 혼자서 글을 읽으며 사색할수 있었다.그리고 아름다운 천혜의 환경을 이용하여  세연정을 지어 풍악을 울리며 여러명의 기녀들로 하여금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면서 여흥을 즐겼다고 하며,때로는 연못에 배를 띄우고 동자들을 배에 태워 어부사시사를 부르게 하기도하였다한다.

이보다 더한 신선 놀음이 또 어디에 있을까?서인이 집권하던 시기에 남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쟁에 휘말리며 20여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지만 조상이 물려준 유산 덕에 백이숙제의 고사리 캐는 것과는 거리가 먼 화려한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풍요로운 삶이 뒷받침되었기에 그의 문학적 역량이 맘껏 발휘되었는지도 모른다.세연정에는 오늘도 여전히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 구슬프게 흘러 나오고 있다.수국의 가을이 오니 고기마다 살져있다.닻 들어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만경징파 슬카지 용여하라 지국총 지국총 어야디야 어야디야 인간을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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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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