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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자리잡고 있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와 그의 흔적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매봉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수대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출신으로 1916년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유관순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1920년 9월에 순국하였고,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은 찾지 못하였다. 천안시에서는 유관순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3·1운동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72년에 사당을 세우고 열사의 초상을 모셨다.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여 매년 3월 마지막날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위치한 유관순열사 생가는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열사 생가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모두 전소되어 빈터만 남아 있는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생가 옆에는 열사가 다녔다는 매봉교회가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8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 충청연회에서 6억을 들여 다시 건축했다고 한다.


유관순열사 생가의 우측에는 열사의 생가비문이 있으며, 비문의 뒤쪽으로 산길을 따라서 한참 올라가면, 봉화대가 있다.


생가옆 관리사 건물은 1977년 한옥으로 건축하여 열사의 가족에게 유관순열사의 생가를 관리하면서 거처하도록 하였다. 당시 유관순열사의 남동생인 유인석씨의 가족이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비어있다.



생가의 울타리는 돌담장으로 둘러쌓여 있는 좁은 싸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에 작은 건물은 2칸으로 되어있으며, 한칸은 헛간으로, 한칸은 광으로 구성되어있다.



유관순열사의 건넌방에는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고 기록된 경성복심법원 재판 기록문에 근거하여 연출하였다. 왼쪽부터 유관석(남동생), 유예도(사촌언니), 유관순, 유인석(남동생)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유관순의 안방에는 왼쪽부터 이소재(모친), 유중무(숙부), 김구웅(교사), 조인원(마을유지), 유중권(부친)등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하는 모습을 재현하였다.



안방옆에 있는 부엌의 좁은 부뚜막 위에는 작은 솥단지가 나란히 2개가 걸려있다.


생가의 뒤곁으로 나가보니 나무그늘 밑에는 장독대에 몇 개의 장독이 보인다.


생가는 전통적인 초가삼간의 형태로 지붕은 볏집으로 이엉을 엮어서 해잇고, 새끼줄로 꼼꼼하게 얽어 매었다.


매봉교회는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처하며 상처받고 있을 때 몸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교회이다. 1905년 일본의 강압속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를 한탄하며 을사의병이 일어나 항일운동을 펼칠 때 매봉교회는 을사의병들을 뒤에서 도왔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으로 나라의 빚을 갚고자 할 때에도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82명의 교인 명단이 대한매일신보에 실리기도 했다.


이렇게 교회가 주도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하자 일본은 1905년과 1907년에 두 번이나 교회에 불을 질러 교회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다시 든든히 서갔으며 1907년 교회가 전소된 후 1908년에는 유관순의 아버지인 유중권씨와 조병옥박사의 아버지인 조인원씨가 힘을 모아 교회를 다시 건축하게 되었다.


매봉리교회는 유관순열사와의 깊은 인연으로, 교회의 지하에 유관순열사의 업적을 기리는 각종 참고자료 유품들을 전시한 작은 기념관을 갖추고 있다.


매봉교회의 머릿돌과, 간판들도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변천되고, 그 흔적이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의 생가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도 없이 모두 전소되어 빈터만 남아 있는 것을 1991년 12월 30일 대지 714㎡ 에 본채 및 부속사 등을 복원하였다. 생가 옆에는 기념비가 서 있고 열사가 다니던 매봉교회 지하에는 소규모 전시실이 설치되어 있어 열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흔히들 병천이 알려지기는 병천순대로 유명하게 알려져 있는 곳이라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곳이지만, 병천은 그에 앞서 일제 강점기의 수모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독립운동의 거점이다. 이곳 유관순 열사의 사적지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유관순열사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을 기려보는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손색없는 곳이다.

유익한 정보라고 생각하시면, view on을 꾸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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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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