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성거산을 가기위해 지나가는 길에 고려시대 절터인 천흥사지를 답사하게 되었다. 천흥사지는 성거초등학교를 지나서 마을 안길로  따라간다.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기 전 직산 땅을 지나다가 동쪽의 산을 보고 신령이 있다 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성거산'이라 부르게 했다는 산이다.

금북정맥 상에 걸친 성거산은 서쪽으로 태조산과 연결되어 있다. 성거산을 바라보며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서, 소하천을 따라서 올라가니 오른쪽에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좁은 주택가 골목을 빠져나가 작은 포장도로를 따라가니, 길가에 홀로 동그마니 서 있는 5층석탑을 만날 수 있었다. 

천흥사터를 지키는 5층석탑은 고려시대의 탑이다. 아래층 기단이 너무 얕아 마치 1층처럼 보이는 2단 기단 위에 5층의 몸돌을 올렸다.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몸돌의 크기가 작아지는 비율이 그다지 크지 않아서 매우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나 유품을 모시기 위하여 만들어진 건조물로서 나중에는 절 배치상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주불전 앞에 있던 석탑으로서 이곳이 천흥사지임을 알수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천흥사지 5층석탑은 보물 354호로 지정되어있다.

주불전 앞에 서 있었을 석탑과 당간지주 거리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점과 동종·관음상 등 출토 유물로 봐서 천흥사가 얼마나 규모가 큰 절이었나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천흥리 마을 전체가 절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석탑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돌의 구성에도 규율성이 있다. 특히 몸돌의 완만한 체감률은 온화하고 장중한 느낌을 더해준다. 고려 왕조가 시작되면서 석탑의 규모가 커지던 당시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흥사 동종은 국보 제 280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 다음으로 큰 종으로 제작기법이나 양식이 고려 범종을 대표하는 종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자료사진)

천흥사지 석탑이 있는 곳에서 불과 200여m가량 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서 천흥저수지가 보인다. 천흥저수지는1959년에 축조하면서 절터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천흥사지 5층석탑을 답사하고 오던길로 다시 마을을 빠져 나와서, 천흥사 당간지주 표지판을 따라서 50m 쯤에 마을 안길을 들어가니 입구에 수백년 묵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인다.

천흥사 당간지주는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으며, 탑으로부터 약 300~400미터 아래쪽에 있다. 당간지주는 절에서는 의식이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충남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23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천흥사지 당간지주는  보물제 99호로 지정되어있다. 천흥사터에서 출토된 천흥사 동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원년(1010)으로 되어 있어 이 당간지주도 절을 창건하면서 같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천흥사 당간지주는 주변환경이 정비되지 않은 가운데, 바로 옆에 주택의 대문이  있어서 보물로서의 당간지주가 그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움이 더했다.

천흥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성거산이라고 산 이름을 짓고 나서 이곳에 대규모의 사찰을 세웠다고 전한다. 천흥사는 성거읍 천흥리 마을 한가운데에는 당간지주가, 이곳에서 300~400m 떨어진곳에 5층 석탑이 남아있어 천흥사가 얼마나 큰 규모의 사찰이였던가를 말해준다. 

발굴 당시 이 마을 주변에는 와편과 주춧돌이 많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큰 야망으로 이곳에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고 천흥사라고 명명하였으나, 하늘이 흥하게 한 절이라는, 천흥사(天興寺)라는 이름으로도 폐사의 운명을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유익한 정보라고 생각하시면, view on을 꾸욱! 감사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털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