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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 지어진 사찰이라면 상상만으로도 운치가 있다. 불자라 아니라 하더라도 머리 복잡한 날은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경기도 여주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신륵사는 강변에 위치한 유일한 사찰이다. 신륵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가 쪽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 있어서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빼어난 주변 경관과 경내에 화려한 보물과 문화재들이 많아서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극락보전으로 바라보면 울울한 산세가 시야를 가리고 일주문으로 돌아서면 도도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절은 봉미산 기슭에 자리하는데, 봉미산은 우람한 우두산과 혜목산 줄기가 뻗어 내리다가 평탄하게 산봉우리가 솟아 내린 아득한 여강의 물굽이 치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신륵사는 산기슭에 있으면서도 남한강변의 은모래와 유유한 물줄기가 바라 보이는 강촌에 포근히 앉아 그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조선후기 문인 김병익은 '신륵사중수기'에서 신륵사의 경관을 서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세종의 능인 영릉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서 신륵사를 다시 중건하자는 것이었다. 그 이유로 삼는 것이 바로 천년 고찰의 신륵사가 위치한 경관의 뛰어남을 전국 사람들이 일컬은지 천년이나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봉미산 신륵사의 일주문은 신륵사를 들어가기 위한 문으로 사찰의 입구에 서 있는 문으로서,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건한 마음을 느끼게한다.

 

범종각은 사물 즉, 목어, 운판, 범종, 법고 등을 모아 둔 곳으로,
범종각의 법고는 육상의 생물들이 미혹함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치는 것이라한다.

 

구룡루라는 석가부처님이 탄생하실 때 성수를 뿜어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아홉 마리 용에 대한 이야기와,
신륵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아홉 마리 용의 승천과 관계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는 1858년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의 발원에 의하여 호조판서 김병기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하게 되었는데,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업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사찰 경내 중심부에 있는 극락보전은 절의 본당으로,
천정 아래 대들보에는 나옹 스님이 썼다고 전해오는 '천추만세(千秋萬世)'라고 쓴 현판이 걸려져 있다.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극락보전 앞에 흰 대리석으로 쌓은 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복련과 앙련,
물결무늬 등이 매우 사실적이고 구름 속을 노니는 용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신륵사에는 뒤뜰에는 수령 500년 되었다는 향나무가 있다.
이 향나무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만 신륵사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가람의 서북쪽 명부전 옆에 자리한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진 아담한 건물로
절의 여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이라한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조사당 뒷편 언덕 위에는 전망이 좋은 곳에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높이 1.9m 크기로 종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석종이라 부른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
보제존자 석종 앞에는 공양등의 성격을 지닌 높이 1.94m의 화려한 석등이  있다.
이 석등은 고려말기 나옹이 입적한 후 부도를 세웠던 1377년(고려 우왕 3)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보제존자의 석종위에는 석종비가 있는데 나옹선사가 입적하자 각신스님이  석종을 만들고
각주스님이 비를 세울 좋은 돌을 구하여 이색에게 글을 쓰도록 청하여 만들어 진 비이다.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다층전탑은 경내 동남쪽 강가에 솟은 동대위에 있는데,
벽돌의 무늬로 보아 처음 조성한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이는 고려시대 유일의 전탑이 된다.

 

극락보전 동쪽 언덕에 있는 대장각비는 맞은 편에 있었던 대장각에서
대장경을 인출한 기념으로 1387년(고려 우왕 13)에 세운 것이다.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비의 높이는 133cm, 너비 88cm이며 이를 보호하는 돌기둥을 세웠다.
이는 석종비와 같은 양식으로 복련대석과 옥개석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비문은 2cm의 해서체로 당시 직제학 권주가 썼다.

 

전탑 아래는 강월헌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본래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화장터의 석탑 가까이에 세워진 것이다.
강월헌이라는 이름은 나옹의 당호로 그를 추모하여 누각을 세웠다한다.

 

강월헌 앞에 있는 이 탑은 삼층석탑으로 누구에 의해 조성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유히 흐르는 남한강물을 바라보는 경관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강월헌에서 내려다보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변에 누런 황포돗을 올리고
바람을 이용하여 물자를 수송하던 곳으로서, 그 옛모습을 재현해 황포돗배를 타고 유람하는 풍경이 보인다.

 

신륵사는 고려시대 대선사 나옹선사의 선풍이 깃들어있는 도량이다. 그의 얼이 담겨있는 흔적은극락보전과  조사당 그리고 조사당 뒷산에 석종부도, 석종비문에서도 알수 있으며 나옹선사 다비터에 세운 강월헌 누각에도 그의 혼이 담겨있다. 이렇듯 천년고찰의 위용이라도 자랑하듯 신륵사는 성보문화제 중에서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다. 

신륵사의 소중한 유물인 문화제를 돌아보면서 관심있는 관광객들은 천년역사를 지닌 선인들의 얼을 되새겨보는 소중한 시간이 될수있다. 하지만 불자들에게는 소중한 기도도량이기도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하나의 사찰의 의미를 떠나서 남한강변의 산위에 경관좋은 위치에 있어서 주변관광과 더불어 관광명소로서 의미가 새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여강이 몸을 풀어 은빛 모래밭을 빚고, 기름진 옥토를 빚어 건설한 낙토가 여주라했다.  여주에 여덟가지 자랑이 있는데 그 하나가 신륵사에서 울려펴지는 저녁 종소리를 으뜸으로 꼽는다한다. 신륵사 천년고찰의 향기가 하도 유장하고 천년역사의 성세가 하도 우람해 범종소리만으로도 가히 장엄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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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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