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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과 아산을 연결하는 45번 국도로 달리다보면 윤보선대통령 생가라는 표지판을 만날수 있다. 대통령생가는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143번지이며, 45번 국도 바로 옆으로 흐르는 관대천 위로 다리가 놓였고, 관대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항리로 들어가는 길이다. 들판을 가로지른 도로는 낮은 산 고개를 넘고, 곧 새말로 통하도록 이어졌다. 생가는 새말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주변에는 친족의 고택들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일대가 구한 말 상류주택의 일가를 이룬다. 

윤보선 생가가 있는 신항리 마을은 고산 윤선도의 후손인 해평윤씨의 집성촌이다. 이 집들도 19세기 중엽에 지어진 집이니 윤보선 생가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윤보선 생가에서 100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윤일선, 윤승구, 윤제형 가옥이 나란히 있는데 고조부가 같다고 하니 6촌지간의 집 4채가 지호지간에 있는 셈이다.  

여기서 윤보선대통령의 선친인 윤치소에 대해서 조금은 알아야 관계가 이해될것 같다. 윤치소는1911년 당시 조선상업은행 감사였고, 동양서원과 혁신점을 경영하면서 분원자기주식회사 감사를 지냈다한다. 그는 1924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3년간 역임하였다. 윤치소의 6남 3녀 중 장남이 제2공화국 대통령에 오른 윤보선이며,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던 곳이다.



신항리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전형적인 농촌 마을처럼 아늑하게 보였으며, 해평윤씨들이 살고있는 집성촌 고택 사이에 윤보선 생가가 보인다.



윤보선 가옥 (충남민속자료 제196호)

윤보선생가 소슬대문 앞에 서면 다른 집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전에 보던 고택과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고택답지 않게 붉은색 벽돌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니, 다른 고택에 비하여 윤보선 생가는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여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늘을 찌를 듯한 솟을대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문이 딸린 행랑채가 나오는데, 다시 중문을 지나서 내당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마님이 거처했음직한 안채로 연결된다.


대문을 들어서서 오른쪽 맞은편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누각처럼 지은 별채가 보이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추녀와 지붕의 기와 등은 서울의 고관대작들이 즐겨 사용한 재질과 기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랑채에서 우선 눈에 띠는 것은 왕족의 집처럼 보였으며, 모든 외부와 내부의 모든 창호는 대부분 유리문을 사용하였다. 특히 대청과 외부에 노출되는 모든 창호를 유리문을 설치하여 마치 근세에 새로 지은 한옥을 보는 듯하였다.


솟을 대문을 통과하여 뒤돌아본 행낭채의 모습

  
대문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연결된 행낭채


대문에 들어서면 행낭채와 사랑채가 둘려 쌓여서 ㅁ자 형태의 건물로 둘러 쌓여서 넓은 마당이 형성되고  맞은편에 보이는 대문은 중간채 대문이 보인다.


대문을 들어서서 행낭채와 사랑채의 모습은 볼수가 있었지만, 사랑채와 중간채로 통하는 대문은 모두 자물쇠로 잠겨서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었다. 할수없이 긴 담장을 따라서 안채의 모습을 엿보기 위해서 담장을 따라갔다.


담장 넘어로 생가의 안채의 모습을 엿볼수 있었으며, 안채도 ㄱ자 형태로 배치되어있었다. 중문 간채는 ㄴ자 형태로 배치되었으니, 안채의 배치도 ㅁ자 형태로 배치가 되었다.



담장 넘어로 들여다본 안체의 뒤뜰의 풍경이 보이고, 앞쪽으로는 안채의 마당에 정원이 꾸며져 있는 모습을 살짝 볼수 있었다.


윤보선대통령 생가를 돌아보고 나서 건너 마을을 바라보니 몇채의 고택들이 나란히 마을에 가득차게 들어서 있은 모습이 조망된다.


건너편에 보이는 고택들을 돌아보기 위해 맞은편에서 바라본 윤보선생가의 웅장한 사랑채의 전체적인 윤곽을 볼수 있었다.


윤보선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고택은 커다란 소슬대문이 있는 윤일선 가옥의 대문을  통과하면, 윤일선 가옥, 윤승구 가옥, 윤제형 가옥, 이렇게 배치되어있다. 


윤일선 가옥(충남민속자료 제12호)
윤씨 일가가 같이 쓰는 광무 9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솟을대문을 통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윤승구 가옥 (충남 민속자료 제 15호)
헌종 10년(1844)에 지은 것으로 해평 윤씨 일가들이 지었던 상류층 가옥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종가댁이라 불리는 집이다. 



윤제형 가옥(충남민속자료 제13호)
해평윤씨 가옥 3채가 행길을 따라 나란히 늘어서 있는데 그 중 맨 윗쪽에 있는 집이다. 다른집은 모두 비었으데, 이집은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주민이 살고 있었다.


여기서 윤보선 대통령에 대해서 조금만 알아보자. 그는 정치가로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을 창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에 대통령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고,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치가의 걸어온 험난한 업적을 모두 이해하기는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윤보선 생가를 돌아보면서 느낄수 있는것은 다른 전임 대통령들의 생가도 그렇하지만, 당시는 국민들이 의식주 혜결도 못하고 가난에 허덕이던, 전형적인 시골마을 이지만 남들보다 좀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왔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물론 자라온 가정환경이 그들의 면학의 길로 정진할수 있도록 뒷바침이 되었기에 훌륭한 인물로 거듭날수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시골마을에서 태어나서 대통령이 배출된 의미있는 가옥이지만 후손들이 하나둘 농촌을 떠나고, 관리가 제대로 안되니 점차 허물어져 가는 현상을 보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도로변에 표지판은 거창하게 세워져 있지만, 막상 어렵게 찾아가보면, 문화제나 민속자료들이 관리가 제대로 안되는 곳이 많으며, 그나마 훼손될까봐 내부는 자물쇠로 굳게  잠구어져 있어서 관람을 제대로 할수가 없었다. 이 마을에서 누군가가 관리를 하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민들을 찾아보았지,
대부분 방문을 닫아 놓고 외출하였는지 신발 몇 켤레가 덜렁 놓여져 있을 뿐 거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어서 아쉬움이 더했다.

알라딘 창작블로그 "그곳에 가고싶다"에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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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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