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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로 접어드니 제법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주말에, 이번에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으로 역사기행을 떠난다. 한반도의 중추인 백두대간의 허리에서 갈라져나간 금북정맥이 천안 청양을 거쳐 대천 앞 서해에서 끝나게 되는데 이 일대에는 300~800m급 산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대흥면의 봉수산은 이 산들 중 하나다.

동편에 있는 예당저수지가 충청도에서 제일 클 뿐 아니라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크다. 그리고 봉수산 정상 동남쪽에는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사적 90호에 임존성이 남아있으며,
정상을 중심으로 성의 둘레가 약3km에 달하는 산성이있다. 임존성은 백제 때 수도 경비의 외곽기지 역할을 한 성으로, 봉수산의 꼭대기서,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그리고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돌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고 안쪽으로는 흙을 파서 도랑처럼 만들어 놓았으며 또한 성의 네 모퉁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다른 곳보다 약 2m정도 두껍게 쌓았다.

대흥임존성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주류성과 더불어 백제 부흥군이 활동했던 곳으로, 사비성을 되찾기 위한 부흥군의 마지막 근거지이다. 이 성에서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실패했다. 또한 후삼국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이 이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도 전해지는 유서깊은 곳이다. 


봉수산을 오르는길은 여러개의 등산로가 있으나 필자가 선택한 길은 대흥면사무소 뒷길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서 2.7km를 힘겹게 오르니 봉수산 휴양림 시설물이 보인다. 


봉수산 휴양림 시설물을 뒤로하고 등산로 입구에는 봉수산 정상까지 1.5km라는 이정표가 있으나, 등산로에 접어들자 낙엽쌓이고 인적이 뜸한 산길에는 등산로가 명확하지 않아서 잠시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었다.


봉수산 정상에는 특별하게 눈에 띄이는것은 없으며, 다만 봉수산정상이라는 까만색 표지석 하나가 세워져있다.이곳은 예산군 광시면과 대흥면, 홍성군 금마면이 만나는 지점에 해발 484m의 봉수산 정상이다.


정상부근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산하로 내려다 보이는 예당저수지 등 조망도 훌륭하다. 그리고 북동편에 광덕산, 남동편에 계룡산과 칠갑산, 남쪽에 성주산, 서남쪽에 오서산이 보이고 자리를 옮기면 북서쪽에 용봉산, 가야산 등이 보인다고하나 이날은 날씨가 흐려서 조망을 제대로 하지 못한것이 아쉬웠다.


봉수산 정상주변의 북문지로 추정되는 넓은 공간인 갈림길에서 내려다본 광시면 방향으로는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가 보이고 그 산아래쪽에는 백제 고찰인 대련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련사는 백제 의자왕때 의각과 도침이 창건하였으며, 인근 임존산성에 연당과 연정이 있어서 절 이름을 대련사라 하였다


산성의 정상부에서 산성길 능선을 타고 남문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산성길이라지만 오랜 세월이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탓에 나무가 자라고 토사에 묻혀서 산성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될정도였다. 한참만에 도착한 남문지의 편평한 지형에 산불감시 초소가 보이고 이곳에서는 예당저수지가 한눈에 조망되었다.


남문지에서 산성길을 따라서 약600m 정도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600m쯤 내려가면 대련사가 나오고 우측으로 300m쯤 가면 우물터인 청수가 있다는 표지판이 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오니 이곳은 제법 길게 조성된 성곽의 형태가 한눈에 조망되었다.


이곳은 넓은 성터에 임존산성 청수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옆에는 아직도 맑은 샘물이 흘려 나오고 있었다. 이곳은 임존산성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물을 그 안에 모았다가 적의 공격 때 물꼬를 터뜨려 1차적으로 곤경에 빠뜨리고 결정적인 공격을 가할 목적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임존산성은 약 3km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벽의 높이는 2.5m, 폭은 3.5m인데 남쪽의 성벽은 굴곡이 심하여 성내에는 7~8m의 내호가 둘러져 있다. 외벽은 돌로 쌓여 있고 안은 흙으로 메워진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폭이 넓어서 말을 타고 달려도 넉넉할 정도였다고 한다.


의자왕 20년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망했을 때 의자왕의 사촌 동생 복신, 도침스님과 흑치상지가 3년여 동안 후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였으며 백제의 산성 중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커서 산성 연구에 많은 기초가 되고 있다.


임존성은 백제의 멸망 뒤 주류성을 근거로 사비성 탈환 작전에 실패한 부흥군의 최후의 거점지로서, 이 성에서 흑치상지와 지수신등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여 신라군의 군량수송로를 차단하여 나당연합군을 괴롭히는 한편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던 곳이다.


여기서 백제의 부흥운동 이야기가 나오면 한가지 새기고 넘어갈 이야기는 흑치상지 장군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미 역사의 재조명을 통해서 모 방송사에서 "비운이 무장 흑치상지 그는 배반자인가?" 를 방송한적이 있다. 흑치상지의 성 '흑치'는 '검은 이'라는 의미다. 흑치씨는 원래 백제의 왕족성인 부여씨와 같은 성씨며,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

그는 660년 백제의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당하고 의자왕이 항복하자 자신도 항복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의자왕을 가두고 노략질하자 임존성에 군사를 모아 당나라 군대에 대항했다.
저항 초기에는 신라와 당에게 빼앗겼던 200여 성을 회복하는 등 성과를 올렸지만 내분으로 인하여 결국 유인궤에게 항복했다. 이후 그는 조국인 백제의 부흥운동세력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당나라 조정의 신임을 얻었다.

그후
당으로 건너간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무장으로 맹활약했다. 30년 동안 전투에서 한 번도 진적이 없어 당나라의 7대 장수로 손꼽혔다. 당나라를 괴롭혔던 토번과 돌궐을 막아내며 당의 군부서열 12위안에 드는 우무위위대장군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를 경계한 중국 여성황제 측천무후
에 의하여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왜 이렇게 살아야 했는지, 인생사 참으로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흥임존성은 백제의 마지막 부흥지로 알려져 있지만, 13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민족의 시련을 잊어버리고, 무성한 나무들이 자라나고 성곽은 허물어지고 토사에 묻혀서 폐허가 되었지만, 요즘 성곽의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그나마 성곽의 윤곽이 들어나고 있었다. 임존성은 스러져간 백제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묵묵히 인간세상의 흥망을 지켜보고 있고, 늦가을의 참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쓸쓸한 느낌마저 주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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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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