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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양영당은 구한말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한 목숨 바쳐서 풍운을 막아보고자 분연히 일어섰던 "조선 의병"의 넋이 흐르는 곳으로서 굽이굽이 예순 굽이길의 박달재를 넘어, 제천시의 관문에 나지막이 자리잡은 곳이다.

언뜻 보면, 평범하고도 아늑한 고을 한 쪽에 모셔진 사당과 같은 느낌이 들지만 촘촘히 살펴보면 역사의 뒤안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범상치 않은 기운이 스며 있는 곳이 바로 자양영당이라는것을 알 수 있다.

자양영당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유중교선생이 후진을 양성했던 곳으로 고종 26년에 창주정사로 세웠는데 1906년 유림에서 자양영당으로 새롭게 세웠다. 고종 32년에는 의병장 유인석이 팔도 유림들을 모아 비밀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자양영당은 습재 이소응과 화서학파 유림들에 의해 건립 되었으며, 그 해 주자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성재 유중교의 영정을 모셨다. 후에 의암 유인석과 습재 이소응의 영정을 추봉하고 매년 후손과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지내고 있다.

자양영당의 전체적인 안내도를 보고나서 안쪽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보이는 건물이 화동강목장판각이다.


왼쪽에 화동강목장판각 옆으로 솟을 대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자양영당에 부속된 몇개의 건물들이 보인다.


화동강목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37호인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이란 판목은 조선말기의 성리학자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가 중국 송,원대의 사적과 고려의 사적을 합편한 판목을 보관하고 있다.


화동강목장판각은
의암 유인석의 주도 아래 고종 43년 춘천 가정리 가정서사에 간역소를 차리고 판각을 시작하여 1907년 5월에 완료된 것으로, 판목의 재질은 박달나무이고 자본은 유제원 글씨이다.
 

자양서사는 조선말기의 유학자인 유중교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고종 26년에 세운 서당으로, 가운데 자양사서 현판을 중심으로 좌우에 별도의 의미를 가진 현판이 걸려있다.


자양서사는 고종 32년 을미의병 당시 의암 유인석 선생께서 모친상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유림들과 처변삼사를 논의 하던 곳이다.


자양서사의 오른쪽 현판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로서 널리 배우고, 예로서 요약한다면 역시 도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다.


자양서사 왼쪽 현판은 안연이 인에 대하여 여쭈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오는 것이 인이다. 예가아니면 보지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행하지 말아야 한다. 회가 비록 불민하오나, 청컨대 이 말씀을 깊이 새겨 지키겠습니다.


자양영당은 습재 이소응과 화서학파 유림들에 의해 건립 되었다. 그 해 주자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성재 유중교의 영정을 모셨다. 후에 의암 유인석과 습재 이소응의 영정을 추봉하고 매년 후손과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지내고 있다


숭의사는 제천의병의 넋을 기리고자 조성하였으며, 사당 내부에는 호좌창의진의 깃발과 조선말 13도의군도총재 의암 유선생휘하제현신위을 봉안하고 조선말 의암선생을 비롯하여 13도의 의병의 넋을 기리고자 매년 10월 제천의병제 행사시 고유제를 지내고있다.


성재 유중교선생은 조선 말기의 학자로 이항로의 문인이며, 이항로 사후에는 김평묵을 스승으로 했다. 위정척사론을 이어받은 학자이며, 장담마을에 자양서사를 세워 유인석과 이소응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21세 때 화서의 지도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을 편수 했다.


성재 유중교선생의 고택은 초가집이지만 비교적 깨끗하게 잘 보존되고 있었으며, 행랑채를 들어서니 안쪽에 ㄱ자 형태로 안채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아담한 별채한 있다.


안채의 오른쪽 별채에 인적이 있어서 들여다 보았더니,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직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행랑채에는 잡다한 농기구들과 농산물이 보이기에 어찌된것인가 물었더니, 관리직원이 텃밭에 농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성재 유중교선생의 고택은 왼쪽에 자양영당과 오른쪽의 의병전시관이 있으며, 그 사이에 ㄷ자 형태로 보이는 초가집이다.


38번 국도를 따라서 충주에서 제천방면으로 박달재를 지나, 내리막길을 다 내려가면 자양영당이라는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이곳에 들리기 전에는 늘 자양영당이라는 명칭이 궁금했으나 알고보니 정말 큰 의미을 가진곳이였다.

그리고 이곳을 관람하면서 생각지 못했던 제천지역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안내하는 의병전시관까지 돌아보게 됨으로서, 지방유생과 농민이 외세의 침입에 항거하여 구국의 가치를 높인 의병항쟁의 발상지임을 알 수 있었다.

외침으로부터 수난을 당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때 목숨걸고 분연히 일어난 구국의 이념을 계승발전 시키기 위해 조성한 자양영당에서 그 숭고한 뜻을 이어 갈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의 가치가 매우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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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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