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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영인면 지역은 비교적 산세가 험하지 않고 높지 않아, 주말이면 가족단위의 산행을 즐길 수 있는영인산이 있다. 산행 들머리는 여러곳이 있지만, 발길 닿는대로 움직이다보니 영인읍내에서 향교 방면으로 들머리를 잡았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잠시 들어가니, 거대한 루각이 눈앞을 가로 막는다.

여민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호) 는 조선시대의 아산군 관아 입구에 세워졌던 문루인데, 아직까지 비교적 깔금하게 보존이 잘되고 있었다. 여민루를 지나서 마을안길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구불부불한 농로처럼 이루어 졌다. 자칫 차량이라도 만나면 서로 자리를 양보해가며 교행해서 어렵게 빠져나가야 한다.

영인산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김옥균선생 유허, 영인향교, 관음사등 선인들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유적지를 지나게된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면 또한 영인산 들머리 야산에 동그마니 서있는 영인석불과 영인오층석탑을 만나게된다. 별 관심이 없는 등산객들은 그냥 지나치지만 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세하게 돌아보게된다.


문화재자료 240호 영인석불

영인석불은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235번지에 위치한 석불입상으로, 화강암에 높이 265㎝, 너비 87㎝로 조각되어있으며, 문화재자료 240호로 관리되고 있다.


출처 : 현지 안내판 자료

아산리 영인 5층석탑에서 북쪽으로 약 15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석불입상이다. 머리에 보관이 씌어져 있고, 얼굴 형태는 양 볼이 통통하게 조각되었고 귀는 목 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는 당당한 체구로 조각되었고 법의는 양쪽 어깨 중 오른쪽 어깨만을 들어냈다. 옷 주름은 닳아 없어져 확인되지 않지만 배 아래 부분까지 옷자락을 표시한것이 보인다.

왼손은 동그란 보주를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오른손은 엄비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쪽 가슴 앞에 얹어 놓았다. 불상의 목 부분은 시멘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청일전쟁때 목 부분이 절단된 채 그대로 내버려져 있다가 1945년 해방 후 동네 주민들에 의해 다시 얹혀진 흔적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불상 조각의 형태나 보관의 형태 그리고 얼굴의 처리 기법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출처 : 한국 관광공사 자료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위치한 영인석불은 화강암에 높이 2.65m로 조각되어진 석불 입상이다. 영인향교 옆으로 나와 남쪽의 계곡안으로 약 100m 정도 들어가면 아산리 5층석탑을 볼 수 있고, 석탑에서 북쪽으로 15m정도 떨어진곳에 영인석불이 있다.

영인석불은 목부위에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있는데 전해지는 내용은, 청일전쟁때 목이 절단된 채 방치되어 있다가 1945년에 보수한 흔적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있으며, 법의는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있는 형태로 옷주름은 마모되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왼손의 손바닥에는 동그란 보주가 올려져 있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오른쪽 가슴 앞에 올려 놓고 있는 모습이다. 관의 모습이나 불상의 조각형태를 볼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지방문화재 제 240호로 등록되어 있다. 석불과 석탑 사이로 난 계곡길로 들어가 15분쯤 걸으면 합수점 삼거리에 닿는다.


문화재자료 239호 영인 오층석탑

영인오층석탑은 영인석불과 불과 2~30미터의 거리를 두고 영인산 등산로 입구의 야산에 동그마니 남아있다.


출처 : 현지 안내판 자료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건조물이다. 이탑은 중층 기단부와 5충의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었다. 기단부는 높이 110cm로 상층기단의 경우 상대갑석의 윗면에 연꽃을 엎어 놓은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다른 층급 받침이 조각되어 있는데 1.2층은 3단, 3.4.5층은 2단이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전한 기울기를 이루다가 모서리 끝 부분은 고려시대에 흔히 보이는 위로 치켜 올라간 모습이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 보이고 그 이상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대갑석 및 상대갑석이 일부 파손되고 하대석이 없어졌지만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출처 : 문화제청 자료

아산 관음사 근처 야산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탑이 속해있던 절의 역사나 구체적인 유래는 전하지 않는다. 형태는 2층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일부 파손되었으며 위층 기단은 윗면에 활짝 핀 연꽃무늬를 두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딴돌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1층 몸돌 한 면에는 자물쇠 모양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위로 치켜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 1·2층은 3단, 3·4·5층은 2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의 받침대) 위로 복발(覆鉢: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위로 오를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적당하고, 일부 파손되긴 하였어도 전체적인 탑의 모습이 비교적 완전하다.


방방곡곡 여행을 다니다보면 이처럼 천년세월 말없이 동그마니 남아있는 석탑이나 석불을 들판이나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석탑과 석불은 불교문화의 산실이며 예전에는 틀림없이 이 주변에 사찰이 있었다는 판단이다. 이곳에는 언제 새웠다가 언제 폐사 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작품의 모양새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인생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데, 천년세월이란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시 이곳에서 있었을 사찰을 생각하면 아련하게 들리는 염불소리와 목탁소리가 들리는듯하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비록 역사적인 기록은 없지만 오래전 이곳에서 왕성했던 절집의 비밀을 석탑만은 알고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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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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