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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칠금동에 위치한 탄금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륵선생의 가야금을 연주한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필자가 이곳을 처음으로 들렸을때는 지금으로부터 25년전 충주쪽으로 신혼여행을 와서 잠시 산책한 기억이 아련한데, 오랜 새월이 흘러간 지금에야 우연한 기회에 다시금 이곳을 들려보니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탄금대를 쉽게 찾으려면 충주역에서 10분거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비교적 찾는데 어려움이 없다. 탄금대는 원래 대문산으로 불리던 작은 산으로 그 밑에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되는 곳이며 산세가 평탄하면서도 남한강 쪽으로 나 있는 기암절벽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경치가 탁월한 국민관광지이다.

1400여년전 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의 악성 우륵이 이곳에 와 풍치를 상미하며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서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해서 지금까지 탄금대라 불리고 있다. 임진 왜란 때에는 신립장군이 배수진으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산 정상 부위까지 포장이 잘 되어 있고 역사적 뒷이야기 이외에 넓은 야외음악당과 충주문화원,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 노래비,충혼탑,궁도장,신립장군의 애환이 담긴 열두대와 순절비, 탄금대토성, 대흥사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탄금대 유래비 탄금대로 올라가는 길 정면 산 자락에는 위치하고 있다. 크고 작은 여러개의 돌을 직육면체로 다듬어 3단으로 쌓아 지붕모양으로 되어 대석을 형성하고 그 위에 3개의 화강암을 얹고 다시 그위에 몇 개의 화강암을 조립하여 만들어져있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 신라 진흥왕 시대에 가야국과 제일가는악성 우륵이 가야국의 명망을 예견하고 우거지를 찾아온 것이 충주였는데 이곳 대문산의 아름다운 풍치에 감동되어 제자 법지 계고 만덕에세 가무 음곡을 가르치며 가야금을 탄주하니 그 미묘한 음악소리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 부근에 이루었다고 아며 이러한 연유로 탄금대라 호칭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국악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수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 8,000여기를 이르고 이곳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의 무리를 맞아 사력을 다하여 선전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장열하게 최후를 마친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는 대문산에 위치하여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곳에 있다. 이곳은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에서 망명한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탄주한 곳이라고 하여 탄금대라 부르며,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8,000여 명의 군사로 수많은 왜적을 맞아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전적지이다.



탄금대 공원은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안내소가 보이고, 푸른 솔밭사이로 보도블럭을 깔아 놓은 넓은 산책로가 보이는 길을 따라서 천천히 한바퀴 산책하려면, 1시간 남짓 걸린다.


공원입구에 안내소를 지나면 좌측으로 충주를 대표하는 향토가요로 37년 동안 시민의 사랑을 받아 온 ‘탄금대 사연’ 노래비는 탄금대 야외음악당 앞에 세워졌다.


탄금대 노래비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왜적을 맞아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곳으로 이 사연이 ‘탄금정 구비 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 장군 배수진이 여기인가요…’라는 가사에 아련하게 표현돼 있다.


충혼탑 가기전에 오른쪽으로 보이는 감자꽃  노래비가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식민정치치하에서 울분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뼈져리게 음미해야 할 동요가 새겨진 노래비이다.
감자꽃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감자

충혼탑은 문화관에서 열두대로 가는 길 옆에 세워져 있으며, 충혼탑이란 글씨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라는데 의의가 크다.


팔천고혼 위령탑은 상단에 형상화한 혼불은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모습으로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를 상징하였고, 아래부분의 신립장군과 5인 군상은 최후를 맞이하면서도 굴하지 않는 호국충절을 나타내고 있다.


팔천고혼 위령탑을 지나서 작은 산등성이를 올라서면, 남한강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는 넓은 강을 볼수있다.


탄금대기비는 탄금대토성 내의 탄금정 옆 좀 더 높은 곳에 위치하며 탄금정 가는 길 옆에 서 있다. 비문은 육당 최남선이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씨로 완성한 것이라한다.


열두대는 절벽위에는 신립장군이 적군과 싸우다가  투신하여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임진왜란시 신립장군은 적군의 향해서 활을 빠르고 많이 쐈기 때문에 그 활의 열기를 식히고자 이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열두대라 한다.


열두대에서 내려다보면 유유히 흐르는 넓은 남한강에는, 그 옛날 신립장군의 애환을 잊은듯 시원하게 물줄기를 가르며 수상스키를 즐기는 풍경이 보였다.


탄금대 열두대 가는 길목 전망이 좋은 곳에 우뚝서있는 2층누각이 보이는데, 이곳은 탄금대 공원에서 포인트라고 할수있는 탄금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탄금정에서 바라보는 탄금대 낙조가 충주8경중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우륵선생의 탄금대비 탄금정에서 대흥사와 휴게소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한다. 전면에는 부조로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고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롭게 떠있는 조각을 하였고, 그위에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 우륵선생의 탄금대비를 보고 비탈진 산길을 따라서 내려서면, 아담한 비각이 보이며  대흥사 뒷편에 있다. 비의 받침돌은 거북 형태로 조각되어 앞면과 뒷면에 각각 용 두 마리를 양각되어있다.


대흥사는 탄금대 북쪽 계곡의 끝 부분의 춘장공 신립장군순절비각 앞쪽에 있다. 종파는 대한불교태고종이며 1955년 오법우 스님이 창건하였다고한다.

탄금대 궁도장은 문화관과 야외음악당 뒤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통국궁의 전수, 기능 및 저변확대를 위한 공간마련 및 신립장군이 활을 쏘았다는 장소에서 그 넋을 기리기 위한 장소에 궁도장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서 자세히 살펴보면 탄금대는 유원지로서의 명성보다는 조상의 얼이 깃든 곳이기 때문에 찾을 만한 사적지라는 생각이든다. 또한 탄금대 구석구석에 담긴 사록과 가치성을 그대로 묵과 할 수는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시기 이후 탄금대는 우륵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신립과 관련된 비장한 죽음의 현장등, 두가지를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게 되었다. 탄금대의 음악적 흥취와 관련된 면모는 이 부근을 전쟁터로 선택한 신립의 지략에 의하여 전몰한 장졸을 위로하는 슬픈 추억의 현장으로 기억되게 하므로서 우륵선생의 가야금의 풍류와 흥취보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비장하게 죽어간 넋을 위로하는 시를 짖는 곳으로 변하게 하였다. 역사의 세월속에 깃든 탄금대의 감회를, 이곳을 돌아본 현대인은 어떻게 느끼고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웃을수도, 울수도, 없으니 참으로 난감한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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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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