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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정취를 느끼려면 산행이 최고인듯하다. 산은 4계절 변화무상하여 계절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기때문에 같은 산이라도 갈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오랫만에 충남 아산시에 있는 영인산을 찾아간다. 영인산은 영험한 산으로 불렸으며, 산세가 온화하고 높지 않기 때문에 가족산행지로 알려진 곳이다.

산행들머리는 여러곳이 있지만, 발길 닿는대로 움직이다보니 영인읍내에서 향교 방면으로 들머리를 잡았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잠시 들어가니, 거대한 루각이 눈앞을 가로 막는다. 여민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호) 는 조선시대의 아산군 관아 입구에 세워졌던 문루인데, 아직까지 비교적 깔금하게 보존이 잘되고 있었다.

여민루를 지나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다가 도로표지판에서 아산향교와 김옥균선생 유허라는 문구를 발견하게된다. 김옥균선생이라면 누구일까? 학창시절 국사교과서에서 배웠던 갑신정변의 주도자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아! 그당시 인물의 유허가 아산지역에 있단말인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답방을 해야만했다.


영인산, 아산향교, 김옥균선생 유허, 이런 표지판이 있는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면 영인초등학교 바로 앞에 조선시대 관아입구에 있었다는 여민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호) 를 만나게된다.


여민루를 지나서 좁은 마을길 주택사이로 구불구불 길을 따라 300여미터를 지나 왼쪽으로 작은 동산이 보인다. 동산아래 아래 김옥균선생의 묘소와 그의 사당이 보인다. 한말의 풍운아로 알려진 김옥균 그는 누구일까? 그는 1851(철종2)∼1894(고종31) 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 개화 운동가로 갑신정변을 총지휘한 개화파 지도자였다.


한말의 정치가이자 개화운동가였던 김옥균의 묘소이다. 일본 청산의 외인묘지에 있던것을 1924년 9월 11일 현재의 위치로 무덤을 옮겼다. 김옥균은 1870년대부터 오경석 유홍기등과 함께 개화사상을 익혀 승정원우부승지. 참의교섭통상사무. 이조참의. 호조참판. 외아문협판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나라의 자주 근대화에 힘을 다하였다.


삼일천하로 끝나버린 갑신정변 이후 그는?

그는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 달성이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는 길이라 믿고 정치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국가정책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단행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청나라 군사 1,500명의 무력진압으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다시 1894년에 중국상해로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암살당했다.

▲ 김옥균선생의 묘소 오른쪽에 있는 사당

▲ 김옥균선생의 묘소 오른쪽에 있는 사당

▲ 작은 동산에 자리한 김옥균선생의 묘소

▲ 작은 동산에 자리한 김옥균선생의 묘소

▲ 묘소와 망주석, 석등, 석양, 문인석, 동자석, 묘비


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의 묘이다.

김옥균의 호는 고균, 시호는 충달공으로 조선 조 철종 2년(1851) 1월 23일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출생하였다. 고종 9년(187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며 1884년 조국 개화를 위해 갑신 개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894년 한. 청. 일 3국의 제휴 위한 삼화주의를 제창 동양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청국의 실력자 리홍장과 의논하고자 텐진을 방문하던중 동년 3월 28일 상해 여관에서 수구파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으며 시체는 본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갑오경장으로 개화당내각이 조직된 후 총리 김홍집등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 되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 추증(追贈), 익호(謚號)는 충달(忠達)이다. 묘는 일본 동경 청산외인 묘지(靑山外人 墓地)에서 1914년 9월 11일 의발(衣髮)을 이장, 정경부인 유씨와 합장한 것이다. -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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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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