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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을 보기를 돌같이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위해 받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라  최영장군"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에 이런 노래가 운동장에서 여기저기 많이도 들렸었다.
여자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노래가 생생하게 기억나서 그 구절을 읇어 보았다.

일산에서 고양을 지나다가 베트남 참전비가 도로변에 보이고 이어서 "최영장군 묘" 라는 표지판이 보여서,
안내판을 따라서 지방도로 약 3km정도 들어가니 작은 시골마을이 보이면서 농로를 따라서 들어갔다.
막다른 시골집 한쪽편으로 주차를 하고 주민에게 물어보니 여기서 산길로 20분정도 올라가면 최영장군 묘가 있다고 한다.옛날부터 많이 들어보던 장군의 이름이라 낮설지 않고 "황금보기를 돌같이하라" 이말이 떠올라 장군의 묘를 찾아가 보았다.

최영장군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 번지 이며 경기도 기념물 제 23호로 지정되어 있다.막다른 시골집 진입로에 주차를 하고나서 넓은 돌계단을 올라서면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뒤로하고 산속으로 난 길이 보이는데 비교적 널찍하게 길이 확보하고 있어서,
어떤 복장차림이든 구애 받지 않고 묘소까지 도달 할 수 있다.
산속이니 만치 경사로를 따라서 20분쯤 올라가다 보면 이마에서 촉촉하게 땀방울이 맺힌다.



고려 말기의 명장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죽임을 당한 최영의 묘이다.최영은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공민왕 1년(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이후 100여 회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명장으로 특히 공민왕 5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되찾았다. 또한 요동정벌을 단행하여 팔도도통사로서 전쟁을 지휘하였으나 출병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막지못하고 이성계에 의해 체포되어 유바되었다가 1389년 개경에서 73세를 일기로 처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으로 섬겨지기도 하였다.

최영장군 안내문을 읽어 보고나서 좌측을 보면 가파른 계단이 길게 보인다.
입구에는 무민공 최영장군 묘 입구라고 한문으로 표지석을 새워 놓은것이 보인다.
주변에 졸참나무 숲속이라 계단길에 많이 흩어져 있는 낙엽을 밟으며 급경사 계단을 단숨에 오르니 숨이 가쁘다.

 급경사 돌게단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하니 이번에는 한글로된 표지석이 보인다.
안쪽으로 멀리 보이는 최영장군의 묘가 보이기 시작했다.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에 비석들과 상석등 몇 종류의 석물과 묘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보인다.

최영의 묘는 풀이 돋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 최근에는 무성하다고 한다.
최영 장군의 묘는 쌍분으로 되어 있는데 뒤쪽에는 아버지 최원직의 묘이며
앞쪽의 묘가 최영 장군의 묘이며 아내인 문화유씨 부인과 합장되었다.  

최영장군 묘소 우측에 세워진 충혼비다. 
최영 장군 충혼비는 1970년 대한민국 국방대학원문화공보처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장군 묘소의 좌측에 세워진 비석은 세워진지 아주 오래된 듯 비석이 색깔이 변해 있었다.
高麗盡忠奮佐命安社功臣判密直事大將軍門下侍中(고려진충분좌명안사공신판밀직사대장군문하시중)
贊成事六道都巡察使鐵元府院君謚武愍東州崔公諱 瑩之墓(찬성사육도도순찰사철원부원군익무민동주최공휘 영지묘)
三韓國大夫人文化柳氏祔左(삼한국대부인문화유씨부좌) 이렇게 씌여 있다.

 최영장군의 묘소 뒤쪽의 묘소 부친인 최원직의 묘이다.
 봉분의 주변석은 사각형이며 묘소 주변의 담길이가 50m정도 둘러지고 담장위에 기와가 씌워져있다. 
석물로는 상석과 갓형의 묘비가 새워져 있는데 오랜 세월을 견디어온 흔적이 역력하며 글자가 잘보이지 않았다.
"贈推忠雅亮兼儉輔世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判門下府事上護軍兼判藝文 春秋館事東原府院君崔公墓"
(증추충아양겸검보세익찬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판문하부사상호군겸판예문춘추관 사동원부원군최공묘)라 새겨있다.

장군이 16세 되던해 부친 최원직이 돌아가시기 전에 장군에게 가르치기를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부친의 말씀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근면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최영장군은 충신이자 명장 이면서도
평생을 청렴하게 지냈다하여 공직자들에게 귀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위는 비록 재상과 장군을 겸하고 오랫동안 병권을 장악하였으나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장군의  청렴결백함에 탄복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이런 청백리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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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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