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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당은 숙종 32년(1706년) 공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최초로 사당을 세웠으며,임금이 공의 업적을 높이 치하하여 현판까지 직접 하사하였으나,그동안 무수한 세월이 흐르면서 수차레 탄압으로 향불이 꺼질 위기도 있었으나,관심있는 국민들이 성금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어서 300년의 세월이 흘러간 오늘도 현충사에는 충무공의 얼을 기리는 향불은 꺼지지 않고 모락모락 피어올라 엄숙하고 경건함을 더해주고있다.

 충남 아산에 자리하고있는 사적 제155호로 지정되어있는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충무공이 순국하신지 108년이 지난 숙종32년(1706년)에 공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한동안 일제의 탄압으로 퇴락된 것을 온겨레의 성금을 모아 1932년에 중건하였고. 1966년~74년에는 본전 유물관,고택등을 중건하고 조경공사를 하여 오늘의 경관을 갖추게 되었다.매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으며,이순신의 묘소는 아산온천 방향으로 약9km 떨어진 음봉삼거리 어라산에 모시고 있다.

멸사봉공의 정신,창의와 개척정신,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대표되는 충무공의 정신을 오늘에 비추어 훌륭한 거울고 삼아, 이겨레에 남기고 간공의 빛나는 정신뿐만아니라, 인진왜란 7년간의 세우신 위대한 업적은 우리역사에 길이 빛나려니와 고인의 생애를 통해 일관된 우국의 충정을 이제 우리 새로운 세대가 다같이 우러르며 본받아야 할바가 아닌가 하는 엄숙한 생각을 가지면서 충의문을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갔다.

현충사 경내는 무척이나 넓은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고 각종 나무들이 조경으로 심어져 있어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으며 주변에는 노송들이 우거져 있고 본전, 옛집, 활터, 이면공묘소, 충무정, 유물관, 구본전, 정려, 충무문등의 있다.

충무문을 통과하여 우측으로는 정려가 있으며 이건물은 지난날 충신이나 효자 열녀가 나면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걸어둠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정신을 고취하고 본받도록 세웠다한다.이정려에는 정조대왕이 하사하신 이충무공과 공의 조카 강민공 이완,4대손 충숙공 이홍우,5대손 충민공 이봉상,8대손 이제빈 네분의 충신과 한분의 효자 편액이 걸려있다.

정려의 뒤쪽으로는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는 큰 느티나무가 한그루 있은데 이나무는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에게는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정자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나무높이 20m 둘레 4.8m 수관폭 20m로 넓은 그늘을 제공하고 있고 연못 옆쪽에 있어서 현충사에서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아산시에서 시 보호목으로 지정하여 보호를 받고있다.

이 연못은 1972년 현충사 경내에 새로이 조축된 연못으로 현충사의 조경을 돋보이게 해주며,연못에 비단잉어들이 수백마리가 몰려다니며 노는것이 장관을 이루어 경내의 풍취를 한결 더 그윽하게 하고있다.아치형 석재로 조축된 구름다리가 어울려 한층 풍취를 더하고 있다.

 현충사 경내의 모든 공간은 온통 포근한 잔디밭으로 조성되어있고 중간중간에 각종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계절마다 색다른 풍취를 더해주며 여름철에도 시원한 공간에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주변에는 온통 노송들이 우거져 있는 길을따라 매미소리 들으면서 끝까지 올라가니 앞쪽에 수직계단이 특색있게 보이는 이곳이 바로 이면공의 묘소이다.이묘소는 공의 세째아들의 묘소로 재일 높은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뒤쪽으로는 온통 노송들이 우거져있어 풍치를 더해준다.

이면공은 충무공이 극진히 사랑하던 셋째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여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란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아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을때 왜적들이 이마을에 쳐들어와 분탕질을 하자 나아가 왜적을 무찌르고 21세의 약관으로 장렬히 전사하였다한다. 

옛집 옆에는 늠름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곳이 바로 충무공이 활을 쏘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다.활터에서 남향으로 145m 떨어진 곳에는 과녁판이 있다 .충무공이 시위를 당기던 당시로는 200m 의 거리였다고 한다.활터를 굿굿이 지키는 이 우직한 은행나무는 수명이 500여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집으로 이름지어진 고택은 충무공이 무과급제 전까지 살던 집이다.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며 굳게 지켜오다가 옛집 보존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1967년 옛집 옆에 분가를 신축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으나 2년뒤, 분가 주위가 어수선하여 종손주택을 경외로 이주시키고 경내에서는 일체 농사를 짓지 않도록 하였다.옛집 뒤에는 이충무공을 비롯한 후손들의 위패가 모셔진 가묘가 있다.

이 우물물은 충무정이라고 이름하며 옛집 대문 옆에 있는 정자형의 우물이다.충무공이 자라면서 마시던 물로서,후세 사람들이 충무정으로 불렀다.현재는 화강석으로 현대식 우물로 정돈 한것으로 지금까지도 언제나 맑은 샘물이 넘쳐 흘러 참배객들의 갈증을 풀어주고있다. 

현충사 본전에 들어가려면 충의문을 통과해야 들어갈수 있다.수직계단을 올라가면 충의문이 열리고 잠시들어서면 멀리에 현충사 본전이 보이며 경내를 조금걸어가면 또다른 수직계단이 보이며 이곳을 올라가면 주변에 향불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누구나 여기에 들어서면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충무공의 영정을 모셔놓은 현충사 본전이다.

본전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며 현충사를 협의로 부를 땐 이본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일 먼저 발길을 향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는 곳이다.지금의 현충사 액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한 것이며 이전에 숙종 임금이 하사하신 액서는 유물관에 보존되고있다.

현충사 본전에 모시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의 모습이다.본전에 모신 충무공의 영정은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리고 1973년 이충무공 영정 심의위원회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이다.공의 초상화가 애초에 없었음으로 영정을 그리기 위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옛문헌의 고증이 있었다.

정문입구에서 똑바로 올라와서 현충사 사당을 들어가려면 홍살문을 통과하여 충의문의 지나고 본전에 참배할수있다.이홍살문은 1932년 사당을 재건할 당시의 정성어린 국민들의 성의를 길이 보전하고자 현재 경내 면적을 확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있다고한다. 단 1968년 성역화사업 재조정으로 참배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본래의 목조 홍살문이 미약하다고 판단되어 그것을 해체하고 그규모를 확대하여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다한다.

 전체적인 규모로 보아 경내의 중간쯤에 이르럿을때 중앙의 화단에는 특색있는 모양과 색깔의 푸르른 거대한 소나무 한그루가 중심을 잡으듯이 우뚝서 있었다.

본전에서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는길은 곧바로 내려오면 홍살문을 통과하여 유물전시관이 있고 우측으로 돌아서 나오면 거대한 터널이 나타나는데 양쪽으로는 돌을 터널형태로 축조했지만 지붕을 쳐다보면 철제빔으로 되어있어 여름철에는 등나무가 엉커있어서 시원함을 더해준다.

 터널을 빠저나와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유물전시관이 보인다.유물관에는 이충무공의 유물과 당시의 무기들을 전시해 둔 곳으로 1962년에 슬라브 건물로 내사문 안 좌측에 건립되었다가 1967년 난중일기 도난사건이후 참배도로 입구인 현위치에 한식 철근 콘크리트 맛배집 구조로 확장 신축하였다.유물전시관에는 충무공의 유물,교지,문헌,한산해전도,거북선및 해전 무기들,비문 탁본,각종포,등각종 문헌들이 전시되어있다.

숙종 32년(1706년) 사원 형식의 사당을 세워서 공의 얼을 기리고 임금이 친히 현충사 액자를 하사하여 충무공의 위패를 모시던 구본전 건물입니다.현충사에 대원군이 서원 철페령과 일제의 탄압으로 존페위기에 놓이게되자 이충무공 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국민들의 민족성금으로 다시금 현충사가 부활하게 되었으며, 1966년 현충사의 성역화 계획에 의해 본전이 새로 신축됨에따라 1968년 지금의 위치에 원형대로 이전해서 보존되고 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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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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