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입구의 삼거리 등산로 입구에 오른쪽은 옥양봉,석문봉 왼쪽은 가야봉,향로봉이라 되어있다.
좌측길로 조금올라가면 남연군 묘가 보인다.
넓고 평평한 벌판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뒤쪽으로 남연군 묘비의 표지석이 보인다.
비석의 뒤쪽으로는 묘소 올라가는 작은 계단길이 보이고,
비탈진 계단길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그곳에 묘소가 있다.
묘소 아래쪽에는 울타리처럼 둘러진 은행나무 보호수가 있다.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무덤이다.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잡고 있으며,앞으로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무덤을 1846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남연군의 무덤자리를 찾기 위해 지사 정만인에게 부탁하였는데,
그는 지금의 자리를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고 지목하였다한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원래 묘자리에는 탑이 있었는데,
대원군은 절을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옮겻다는데,묘를 옮긴지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철종의 후사가 없어 가까운 종손인 명복이 12세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이다.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였는데 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사건으로 국내외에서 커다란 비난을 받았고,대원군의 쇄국과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옮긴후,
광천리 마을에 주었다고 전하는 상여와 동일한 재현품을 보관하고 있는 보호각이다.
여기에 보관하고 있는 남은들 상여는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 전홍수(한국고전건축 박물관장)씨가 정밀 실측 조사후 제현한 것이다.
장강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부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 노랑, 힌색의 천으로 근엄하면서 호화롭다.
옛날 왕실의 장례문화는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풍수지리설에 말하는 명당자리를 찾아오기 위하여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 예산까지 시신을 모시고 500리길을 상여로 이동하는데는 많은 인력이 투입되어야 했고, 한 지방을 통과할 때마다, 그 지역 주민이 동원되어 각 구간을 연결하여 모셔가는 방법을 택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광천리 주민들은 남은 구간을 매우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이 마을에 주었고 지금도 광천리 보호각에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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