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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여행 2일차 오후일정은 전남 으뜸경관 10선중에 포함된 거금대교를 건너서 거금도로 진입했다. 거금도는 조선시대에는 도양목장에 속한 마목장의 하나로 절리도라 하였다. 또한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흥군 금산면으로 편입되었는데, 큰 금맥이 있어 거억금도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거금도가면 정말 거금이 생길까?

 

거금대교를 건너서 27번 국도인 거금일주로를 타고 잠시 달리다보면, 금진터널을 통과하게된다. 그리고 조금 더 달리다보면 국도변에 커다란 세로간판에 '김일 기념체육관' 이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김일 체육관은 도로변에서 100여미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진입해서 곧 바로 주차공간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부터 김일 기념체육관으로 고~

 

김일 기념체육관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명사이며,

박치기의 왕으로 칭하는 프로레슬링 전 WWA 세계챔피언인 김일 선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1993년 그의 고향인 거금도에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서 세워졌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그가 평생 3천여번의 링위에서 뿌린 땀과 정열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김일 선수의 역사가 담긴 우승 트로피, 우승컵, 챔피언 벨트, 기념패, 사진 등이 많이 전시되어있다.

하지만 아직 일본에서 가져오지 못한 기념패도 있다고~

 

 

김일 기념체육관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측으로는 실내체육관 시설을 들어가는 대문이 있지만, 잠겨있어서 실내 구경은 못했다.

그리고 좌측편을 보니 유품전시실이 있어서 들어가서 한바퀴 둘러보았다.

 

 

김일 선수는 한국 프로레슬링 1세대로 활약하며 1960년대~70년대에 일본과 한국에서 '박치기 왕'으로 불렸다.

당시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6,70년대에 박치기왕 김일선수는 우리의 희망이었다.

 

당시에는 변변한 즐길 거리가 없었던 시절이라 프로레슬링은 최고의 인기 종목이였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다가도 박치기 한방으로 우리의 모든 시름을 날려줬던 김일선수.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서 흑백 TV에 나오는 레슬링 경기를 구경하면서 환호성 지르던 추억이 생각난다.

 

 

김일선수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반까지 '박치기 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1963년 미국 원정 세계레슬링협회 세계태그챔피언,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6년 도쿄 올아시아 태그챔피언,

1967년 제23대 세계레슬링협회 세계헤비급 챔피언,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 헤비급 태그챔피언

등 20여 차례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고 30여 년간 3,000여 차례의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그는 국내 씨름판을 주름잡다 역도산의 레슬링 기사를 보고 1956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불법체류자로 잡혀 일본에서 1년간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역도산에게 계속 편지를 써서,

설득함으로서 1957년 도쿄의 역도산체육관 문하생 1기로 입문하고, 그의 특기인 박치기를 연마했다.

그는 결국 우리 국민들 마음속에 영원한 박치기왕으로 기억되는 선수였다.

 

 

전시실 중앙에는 대형 모니터에 김일선수의 일생을 소개하는 영상이 계속해서 상영되고 있었다. 1960~70년대 당시에 우리 국민들에게 박치기 왕이라는 영원한 전설을 심어 주었던 김일 선수 기념체육관에서 유품전시실을 이렇게 간단하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공원입구에 김일 선수의 동상앞에서 옆구리에 두손을 얹고 똑같은 포즈를 취하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혼자서는 조금 멋쩍어 보이더니, 단체로 포즈를 취하니 아주 재미있어 보인다. ㅋㅋ

 

 

☞ 2박 3일간 고흥여행의 다음코스는 거금도 금산해안절경을 보러 떠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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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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