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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따끔따끔한 여름 햇살이 내리 쪼이는 주말 오후에 이번에는 경기도 여주땅으로 들어섰다. 영동고속도로 여주인터체인지 주변 37번 국도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위치인, 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 답사하였다.
명성황후는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1895년 양력 10월8일 새벽 을미사변으로 경복궁 옥호루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본 생가는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 (숙종 13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소 관리를 위해 지어진 묘막으로 건립되었다. 민유중의 직계 후손인 민치록은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이곳에서 살다가 1851년 9월 25일 이곳에서 명성황후를 낳았다한다.
주차장에서 명성황후 기념관 쪽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높은 정자각과 작은 연못이 있다. 이연못은 명성황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테마형식으로 조성된 전통연못으로 구성되어있다.
명성황후 기념관 우측에 위치한 문예관은 명성황후와 관련된 영상물을 단체 관람객들에게 상영하고 있으며, 명성황후와 관련된 행사등을 위한 문화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전시관 주변에는 명성황후의 개화 사상과 민족 자주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명성황후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전시실에는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사진 촬영금지구역)
이곳은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까지 살던 집이다. 당시 건물로 남아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생가의 대문을 통하여 행낭채에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있고, 그 안쪽으로 작은 대문을 통과하여 안채로 들어갈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서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우측은 행낭채이고 좌측은 안채건물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작은 쪽문은 별당채로 나가는 문이다.
안채는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공간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대문의 제일 안쪽에 있는 공간으로 주인마님의 주된 공간이기도 하다.
안채의 구조는 안방, 웃방, 건너방, 다락, 대청마루, 광, 부엌,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안째의 대청마루에 비치된 명성황후의 초상화와 친필
안채의 맞은편에는 사랑채가 있으며,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할수 있는 공간이다.
명성황후 생가의 안채와 사랑채는 각각 'ㄱ' 자 형태로, 이사진은 안채에서 마주보이는 사랑채로서, 우측의 대문을 통하여 안채 마당으로 들어 올 수 있다.
안채의 우측에 있는 부엌의 구조
안채에 있는 창고의 구조
몸채의 우측에 작은 쪽문으로 나오면 별당채가 있다. 별당채는 사랑채의 연장이며 다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자녀나 노모의 거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별채에서 글을 읽고 있는 명성황후의 모습
좌측 사랑채 구조와 우측의 별당채 구조
행낭채에서 베틀로 베를 짜는 아낙
행낭채에서 짚신을 삼고있는 머슴
행낭채 우측에있는 재래식 화장실
생가 옆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것을 증명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1895년 양력 10월8일 새벽 을미사변으로 경복궁 옥호루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본 생가는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 (숙종 13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소 관리를 위해 지어진 묘막으로 건립되었다. 민유중의 직계 후손인 민치록은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이곳에서 살다가 1851년 9월 25일 이곳에서 명성황후를 낳았다한다.
주차장에서 명성황후 기념관 쪽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높은 정자각과 작은 연못이 있다. 이연못은 명성황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테마형식으로 조성된 전통연못으로 구성되어있다.
명성황후 기념관 우측에 위치한 문예관은 명성황후와 관련된 영상물을 단체 관람객들에게 상영하고 있으며, 명성황후와 관련된 행사등을 위한 문화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전시관 주변에는 명성황후의 개화 사상과 민족 자주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명성황후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전시실에는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사진 촬영금지구역)
이곳은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까지 살던 집이다. 당시 건물로 남아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생가의 대문을 통하여 행낭채에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있고, 그 안쪽으로 작은 대문을 통과하여 안채로 들어갈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서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우측은 행낭채이고 좌측은 안채건물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작은 쪽문은 별당채로 나가는 문이다.
안채는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공간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대문의 제일 안쪽에 있는 공간으로 주인마님의 주된 공간이기도 하다.
안채의 구조는 안방, 웃방, 건너방, 다락, 대청마루, 광, 부엌,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안째의 대청마루에 비치된 명성황후의 초상화와 친필
안채의 맞은편에는 사랑채가 있으며,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할수 있는 공간이다.
명성황후 생가의 안채와 사랑채는 각각 'ㄱ' 자 형태로, 이사진은 안채에서 마주보이는 사랑채로서, 우측의 대문을 통하여 안채 마당으로 들어 올 수 있다.
안채의 우측에 있는 부엌의 구조
안채에 있는 창고의 구조
몸채의 우측에 작은 쪽문으로 나오면 별당채가 있다. 별당채는 사랑채의 연장이며 다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자녀나 노모의 거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별채에서 글을 읽고 있는 명성황후의 모습
좌측 사랑채 구조와 우측의 별당채 구조
행낭채에서 베틀로 베를 짜는 아낙
행낭채에서 짚신을 삼고있는 머슴
행낭채 우측에있는 재래식 화장실
생가 옆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것을 증명하고 있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각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 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우측 산쪽 150m 지점에 그의 묘가 있다.
▲ 명성황후 생가 좌측에 민가마을은 조선후기 취락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이미 학창시절 국사시간을 통하여 명성황후에 대하여 조금은 알았지만, 명성황후의 생가를 방문하면서, 각종자료를 통해서 많은 사실을 알수 있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조선 침략시기에는 뛰어나 인재를 고루 등용토록 했으며, 외침 세력을 견재하고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였다.
그는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뛰어난 외교력의 소유자로서 국모의 위엄을 갖추었다. 그러나 왜곡된 명성황후의 생애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전해진 이유는 조선근대사를 쓴 사람이 일본인이였으며,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한데서 비롯하였다한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반대파 세력이나 친일파들로 하여금 중상모략토록 하였으며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비하시켜 왜곡했다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혼신을 기울이다 일본의 만행으로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역사왜곡을 바로 잡아 후세에 더 이상 부끄럼 없는 민족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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