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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봉황이 산에 있는는 사찰, 용봉산의 용봉사라는 그 이름조차 범상치 않다. 이 절은 확실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으나 각종 유물에 의해 백제 말 혹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찰은 용봉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절의 이곳 저곳에 많은 문화유산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2개가 있는데, 고려초로 추정되는 마애불과 조선후기 1690년에 조성된 영산회괘불탱으로서 이들 성보에 의해 사찰의 격이 높아 보인다.
더욱이 이 사찰의 창건시기를 백제시대로 소급해도 좋을 것으로 여겨지는 석조가 있는데 이것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사찰의 앞쪽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마애불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사찰 경내에 부도 또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용봉사에는 홍성 지역의 사찰 중에서 불화, 불상, 부도, 석조공예품 등 종류가 다양하고 내용이 풍부한 성보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고찰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봉사는 고려시대에 방 아흔 아홉칸에 불도를 닦는 승려가 천여명에 이를  만큼 큰 절이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용봉사의 가람배치 상태는 남동향의 건물로 전체면적은 정면 약 100여m, 측면 60m 정도이고 3단의 대지를 조성하고 있는데, 최상단에는 60㎝ 정도의 높이로 축대를 쌓고 정측면 각 3각에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의 대웅전이 중심부에 있다.


용봉사 뒤쪽에있는 병풍바위에서 사찰의 전체적인 가람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울창한 숲에 가려져서 건물의 일부만 조망되고 있다.

 
일주문은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 서면서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한다.


유형 문화제자료 118호 - 용봉사 마애불

용봉사 입구의 서쪽에 서 있는 바위에 돋을 새김한 불상이다. 바위를 불상 모양보다 파내고 조각하였는데 마멸이 심하다. 머리 부분은 뚜렷하게 돌출 되었으나 내려갈수록 안정되어 있다.


문화제자료 168호 - 용봉사 부도

용봉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사리탑으로, 모셔둔 사리의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원래는 이 절 근처의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을, 1910년 경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한다.


용봉사의 가람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단에는 요사체인 적묵당과 용화보전이, 3단에는 대웅전이, 그 뒤쪽에는 삼성각이 배치되어있다.


적묵당에는 좌측에 용봉사라는  현판을 별도로 사용하고 있으며, 멀리 뒤쪽으로 용봉산의 우람한 병풍바위가 더욱 풍치를 더해준다.


용화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보물 1262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용화보전 입구의 벽화


보물 제1262호 - 영산회쾌불탱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용봉사의 당간지주는 최근년에 세워진것으로 녹이 쓸지않는 스테인레스 재질로 세워져있었다.


대웅전은 옛 용봉사에서 주워온 탑 잔재와 주춧돌 등을 함께 쌓은 축대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 건물을 건립하였다.

 문화재자료 제 162호 - 용봉사 석조물 
최하단에는 평탄한 대지와 구분하여 1단의 축대를 쌓고 동편에는 용봉사지 주변에 있던 석조, 맷돌 절구 등의 석제품들을 옮겨와 모아 놓았다.


대웅전 앞뜰의 석축위에 있는 동자승들의 재미있는 모습들


보물 제355호 - 홍성 신경리 마애석불

용봉사 뒷산으로 약200m 정도 올라가면 돌출된 바위면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높이 4m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어져있다.


용봉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정책에 의한 수난으로 재 건립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선 종교 정책은 숭유억불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곧 바로 풍수로 연결되는 데, 원래 절집은 거의 명당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것이 조선 종교 정책에 의해 수난을 당하게 된다.

우선 용봉사에 가면 좌측 위쪽에 평양조씨 묘지가 있다. 이 묘지의 터는 보기힘든 기룡혈(말 탄 듯한 혈로 혈을 세우고 그 앞에 투구봉을 세우는 특이한 혈)에 섬룡혈(지나가다 번쩍 혈을 세우는 혈)과 옥병사가 뒤를 받쳐주어 명당이라한다. 그런데 본래 이곳이 용봉사가 있었지만
, 조선후기에 명문가로 유명한 풍양 조씨가문에서 명당자리에 묘를 쓰려고 절을 폐사 시켰다고 한다.

현재의 용봉사는 명당자리인 옛 절터에서 벗어나서 재건되었지만, 오늘도 여전히 용봉이라는 이름값을 하며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나, 사찰에 해악을 끼쳤던 풍양조씨 집안은 명당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후 후손이 끊겼다 한다. 용봉사는 천년을 지켜온 소중한 문화유산이 폐사위기까지 놓였으나 굴하지 않고 재건되어 오늘날까지 소중한 문화유산을 당당하게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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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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