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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를 지나면서 고려 말 명장으로 잘 알려진 최영장군의 사당이 표시된 안내판이 있다.예로부터 홍성은 위인들이 많이 탄생한 곳으로 매죽헌 성삼문선생이 태어난 곳과 같은 마을이다. 그러나 최영장군의 출생지가 혼선을 주었다.

지난가을에 경기도 고양시 대자면 대치리의 최영장군 묘소를 답사한적이 있은데 고양시에서 기록한 문헌에는 장군의 출생지가 철원으로 표시되어있고, 홍성군에서 기록한 문헌에는 홍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철원에서 태어나신 장군의 사당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있을까? 하지만 이곳 주민의 말로는 장군의 출생지이기에 사당을 짓고 매년 영신 제를 올려 영혼을 위로하고 유업을 기리고 있다고한다.

그렇다면 장군의 출생지가 무었 때문에 둘이 되었는지 아리송하다. 역사속에 명장인 최영장군의 출생지가 제대로 정리가 안된것은 그렇지만, 아무튼 홍성지역에서 장군의 사당을 짖고 매년 영신제까지 올리고 있었다.

이곳의 기록에 의하면 홍북면 노은리 삼봉 산정에 있던 최영장군의 사우가 있었는데, 어느 때 철거되었는지 기록이 없고 1995년 말 삼봉산정에 사당이 재건축하였다한다.

홍성군에서는 1995년 문화제 행사시 제 1회 최영 장군 영신제를 갖고 1996년 이후 홍성군에서는 매년 최영장군의 나라를 굳건히 지킨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강직, 청렴한 삶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추모제향을 지내고 있다.
 
장군의 추모제가 올해는 9월 25일 오전 11시 기봉사(홍북면 대인리)에서 최영 장군 숭모회(회장 황필성)가 주관하고 유림 및 동주최씨대종회 50여명이 참석하여 진행되다한다.



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최영장군의 사당인 기봉사를 찾아서~~
 

<충남 홍성군의 사적지 문헌>

고려시대 무신인 최영장군의 사당이다. 최영장군은 1316년 고려 충숙왕 때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나 16세때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을 교훈 삼아 청렴 결백한 관리였다. 고려의 건국 이상인 옛 고구려 땅 만주 벌판을 되찾은데 노력하였으며 홍건적을 격파하고 1360년 남쪽 지방을 괴롭히는 왜구를 섬멸하고 1375년 홍산대첩등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고려 우왕은 장군에게 시중의 벼슬을 주고 전토와 노비를 상으로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73세에 고령에 문하시중의 벼슬을 맡았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우리의 북쪽 지방에 철평위를 설치하고 자기의 땅이라고 하자, 장군은 팔도도통사가 되어 옛고구려 땅인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성계군이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참형되었다.


최영장군 사당이라고 써있는 표지판을 따라서 마을길 끝까지 진입하자 이번에는 산중으로 연결되는 가파른 시멘트 경사로를 만난다. "과연 이곳에 차량이 올라갈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갈 정도로 가파른 길이다.


수직으로 가파른 석축위에 지어진, 기봉사


기봉사 좁은 뜰에서 본 사당의 전경


기봉사 중간지점에서 내려다본 마을풍경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치동, 최영장군과 부친인 최원직의 묘를 찾아서~~ 


<경기도 고양시의 사적지 문헌>

고려 말기의 명장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죽임을 당한 최영의 묘이다.
최영은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공민왕 1년(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이후 100여 회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명장으로 특히 공민왕 5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되찾았다.

또한 요동정벌을 단행하여 팔도도통사로서 전쟁을 지휘하였으나 출병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막지못하고 이성계에 의해 체포되어 유바되었다가 1389년 개경에서 73세를 일기로 처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으로 섬겨지기도 하였다.


최영장군 안내문을 읽어 보고나서 좌측을 보면 가파른 계단이 길게 보인다. 입구에는 무민공 최영장군 묘 입구라고 한문으로 표지석을 새워 놓은것이 보인다.
주변에 졸참나무 숲속이라 계단길에 많이 흩어져 있는 낙엽을 밟으며 급경사 계단을 단숨에 오르니 숨이 가쁘다.

예로부터 최영장군의 묘는 풀이 돋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 최근에는 풀이 무성하다고 한다. 최영 장군의 묘는 쌍분으로 되어 있는데 뒤쪽에는 아버지 최원직의 묘이며 앞쪽의 묘가 최영 장군의 묘이며 아내인 문화유씨 부인과 합장되었다.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최영장군의 전설이 전해지는 적상산을 찾아서~~
 
 


"붉은색 바위지대가 마치 산이 붉은 치마를 입은 것 같다" 하여 적상산이라 불리는 산을 오르다보면, 이곳에도 최영장군이 전설이 전해오는 장도바위라는 거대한 바위를 만날수 있다.

고려말 공민왕때 최영장군이 제주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고 서울로 오르는 길에 적상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암벽을 만나자 칼로 내리쳐서 바위를 쪼개고 그사이로 산을 올랐다고 한다.


장도바위를 지나서 적상산을 오르다보면 최영장군의 건의로 축조했다는 적상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문지를 만날수있다. 적상산성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위의 분지를 에워싼 대표적인 방어산성이다.

고려말 공민왕때 삼도도통사 최영장군이 제주를 토벌하고 서울로 오르는 길에 적상산을 지나다가 사면이 깎아 세운듯한 암벽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에 감탄하고 훗날을 대비하여 성을 쌓을 것을 왕에게 건의했다.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산성을 수축하고, 5대 사고 북쪽 요향산사고가 북쪽지방이 위험해지자 천혜의 요새인 적상산에 적상산 사고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국사를 지켜왔던 유서깊은 사적지로 기록되었다.


최영장군은 16세 되던해 부친 최원직이 돌아가시기 전에 장군에게 가르치기를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부친의 말씀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근면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최영장군은 충신이자 명장 이면서도 평생을 청렴하게 지냈다하여 공직자들에게 귀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위는 비록 재상과 장군을 겸하고 오랫동안 병권을 장악하였으나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장군의  청렴결백함에 탄복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이런 청백리가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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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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