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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유적지는 우리민족이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하여 많은 정성을 들여 성곽을 쌓고  왜침으로 부터 굿건하게 견디어온 흔적이 역력한 고창읍성을 답사하였다.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일명 모양성 이라고도 하며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진 읍성이다.

동,서,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소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읍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읍치소에 축조 한 것으로 처음에는 연해 지역에서 부터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조하였으나 점차 내륙으로 확장되면서 정치,군사, 경제, 사회,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왜구에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읍성의 축조는 고려 말부터 시작하였으나
본격적으로 규식을 제정하여 축조한 것은 조선시대 세종대에 들어서 부터라고 하네요.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개동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등으로 소진된것을 복원해오고 있다.

 고창읍성에는 공북루(북문), 등양루(동문), 진서루(서문)등 3개소의 성문이 있는데,
고창읍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북문인 공북루을 통과하여 입성하게 된다.

 읍성에 들어가기 위해 정문인 공북루의 대문을 통과하여 입성 하였다.
옛날 같으면 문지기가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을건데, 아무도 없으니 썰렁한 느낌이든다. 

입성하자 마자 좌측으로 조그마한 건물이 있어서 가 보았다.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녀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 쳤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이다.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수있는 대원군 척화비이다.
당시 서양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개방을 요구하고 힘으로 밀어 닥치자 흥선대원군이
이 들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쇄국정책을 펴는것 이라고 생각하고 척화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지방의 수령을 자문보좌하던 자치기구로 조선초 유향소,임진왜란 이후 향청이라고 불리워졌다.
향청의 설치 목적은 지방의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는 향촌 교화를  담당 하였다고 합니다.

  장청은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병영 및 진 을 지키는 중앙 군인과 지방의 군.현을 지키는
속오군 제도가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군교들이 군무를 보살 피던 청사이다.

 동헌은 외동헌과 내동현으로 나뉘는데, 이곳은 내동헌이다.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내아라고 불렀다. 

내동헌의 우측에는 정자각 형태의 별도 휴식 공간이 보이는데,
이날 도착하여서 보니까 양반님들이 다과상을 차려놓고 담소를 하고 있었다.
(기생이라도 끼고 놀다가 딱 걸렸으면 암행어사 출두요 소리한번 질렀을 건데~~)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군 현 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동헌이라 하였다.
건물 정면에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과 평근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동헌의 전체적인 모습이다.
좌측에는 평안당이라고 외동헌이 있고 우측으로는 내동헌으로 수령의 살림집이 나란히 보인다. 

 이 곳은 고창읍성 연못 옆에 세운 2층 누각이다.
문헌에는 성내에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건물과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원모습으로 복원하였다는데,
건물 정면에 있는 현판은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풍화루라 하였는데,글씨는 석전 황욱선생이 92세에 쓴 글씨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작청 건물을 복원한 것인데,
작청은 질청이 라고도 하였는데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입니다. 

이곳 작청의 대청마루에는 이방과 아전들이 모여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수근수근 하는지 가까이 닥아가서 들여다 보았는데도 모르고 있었읍니다.
(건전한 국사를 논했으면 다행인데 쓸데없는 작당모의는 안했는지~~모르는척 해야 겠죠?)

 이 건물은 객사라고 하며 중앙의 몸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으며,왼쪽과 오른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본관의 현판에 쓴 모양지관은 이 고장을 모양고을이라고 하였고
이 성을 모양성이라고 불러온데서 비롯된 당호다.

본관을 들여다 보았더니 임금님에 대한 예우로 제를 올리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읍니다.

 이 건물은 동문인 등양루로서 기단 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고,
배면은 화강석 돌기둥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만든 2층 문루인데 1층에는 문지기가 2층에는 초병이 있었겠죠?

 등양루의 주변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 풍속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답성을 한다는  얘기는 없고 부녀자들만 답성을 했을까 약간 궁금하기도 하더군요.)

 동문에서 성곽위로 올라서 북문까지 답성을 하였는데,
이곳의 성곽길은 폭이 넉넉하지 못해서 답성하기가 편하지는 않을것 같았다.
(음! 역시 부녀자들만 무리지어 답성을 하면서 올라오는구만~~) 

입성을 한 북문인 공북루 주변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성문 앞에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을 쌓아 성안에서 밖을 살필수 있는 현안과 총을 쏠 수 있는 총안을 만들어 놓았다.

 고창읍성을 돌아보면서 특이한것은 답성놀이 행사가 두드러지게 띄이는 이야기였다.
성을 밟으면 병이 없이 오래살다가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성을 돌 때는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니,
유사시의 투석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었다는 얘기도
모두 유비무환의 뜻에서 비롯된 호국정신의 빛나는 이야기들 입니다.
모두 공감되는 얘기이고 외부의 침입으로 부터 영역을 지키기 위한 선인들의 지혜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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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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