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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길대교를 건너면 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좌회전을 하면 곧바로 보이는 보길면 소재지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서 해안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면 보길도 중리해수욕장이 보이며, 이곳을 지나 4km쯤 가다보면 보길도의 동쪽 끝 마을에 도달하게 된다. 이곳에 도착해서 나름대로 생각하기는 어느쪽으로 길을 들어서도 해안도로를  따라서 보길도를 한바퀴 일주할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길대교를 건너서 우회전하면 보죽산 아래에서 도로가 끊어지고, 좌회전을 하면 중리해수욕장을 지나면 길이 끊어져서 더이상 갈수가 없었다.

이곳은 중리해수욕장의 바로 동쪽 끝 마을이며 산길을 따라서 해안가로 나가면 막다른 절벽이 나타난다.
해안 절벽 암석을 따라 우측으로 30m 가면 깍아지른듯 서있는 커다란 암벽에 우암 송시열의 글이 새겨져 있다. 송시열 글씐바위는 보길도의 선백도마을 앞 바닷가의 암벽에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말한다.
이곳은 선조~숙종조 의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1689년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상륙했을 때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마음을 한 시로 바위에 새겨놓은 곳이다. 
  

작은 이정표를 따라서 농로길로 접어드니 마을의 끝 길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주차를 하고 해안가로 나가는 작은 산길에 돌을 깔아서 조성해 놓은 산책로가 보인다. 

  작은 숲속길을 걸으면서 잠시 숲속의 공기를 마시다 보면
해안이 보이는 길의 끝이 나타나고 이곳에 우암송시열 슬씐바위라는 작은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우암 송시열의 글을 번역하여 놓은 비문이 있다.
이날 따라 비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하여 비를 맞으면서 도착하니 비문이 빗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죄일까 세번이나 쫒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인데
대궐에 계신 님을 부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훈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잊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새워 놓은 번역된 비문을 읽어 보고 나서 조금더 나가니,
주변은 전체가 반석으로 되어있으며, 오른쪽 산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거대한 절벽이 나타났다.
그럼 글자를 새겨놓은 바위는 어디 있는가 두리번 거리면서 찾아보았다. 

 멀리서 보니 절벽의 앞쪽에 보호선을 처 놓은듯한 로프가 보인다.
낡고 늘어져 보이는 보호선 안쪽으로, 바위에 시커먼 골탄을 발라 놓은듯 검은부분이 눈에 띄인다. 

우암이 유배길에 보길도를 지나다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는 한시 한수를 새겨 놓은 곳이다. 
누구의 짓인지는 몰라도 탁본의 흔적을 남겨서 검은색 때문에 잘 알아 보기가 어려웠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남쪽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가 수평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바로 앞은 소안도가 보이고
주변의 경관은 20~30m의 높은 절벽이 약 300m까지 이어져 있으며, 절벽 위에는 해송이 울창한 곳이다. 

 글쓴바위는 보길도와 소안도 사이 해협으로 소안도가 손에 잡힐 듯이
바다에 떠있으며 주변은 해조류가 풍부하고 해식애가 발달한 천혜의 바다 낚시터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소안도를 바라보면서 해안가에 솟아있는 특이한 절경의 바위가 있어서 한장 찍어보았다.
마치 거대한 팔이 주먹을 움켜 쥔듯한 바위처럼 보였다. 

 글씐바위에서 좌측으로는 절벽 아래쪽에는 잔잔한 바다위에 떠있는 양식장의 부저들이 가득보인다. 

 글씐바위 바로 좌측 옆에 있는 바위로 마치 탁자처럼 평평하게 생겼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에 머물며 절벽위의 바위에 걸터 앉아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시를 지었을 법한 곳이다.

 글씐바위에서 내려다본 소안도의 마을이 오손도손 모여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 보이며 내항과 방파제 사이로 작은배가 지나가는 모습이 정겨운 해안가 풍경이 었다.보길도의 글씐바위를 답사하면서 비문에 새겨진 번역된 글을 되 새기면서 그시절을 잠시 생각해본다
옛날도 오랜 옛날 당시는 사람의 수명이 짧아 회갑만 넘겨도 상 노인으로 대접받던 시절이다.

그당시 80이 넘는 일생을 살며 항상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삼천 번 이상 나온다는 분이지만
우암의 삶은 참 파란만장 하기만 했다.
숙종 15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83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유배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누릴 것 다 누렸지만 80세가 넘어
또 귀양
을 가는데 어찌 신세를 한탄하지 않겠는가?
글씐바위 앞에 가면 바위에 글씨를 쓰고 있는 우암의 서글픈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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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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