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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지역에서는 유난히 많은 미륵불을 만날 수 있다. 안성시 삼죽면 국사봉 아래 궁예미륵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과연 어떤 모습을한 미륵인가 궁금해지면서 국사봉으로 향하였다. 좁은 지방도를 따라서 4km정도 이동한듯하다. 여기에서 쌍미륵사라는 표지판을 따라서 국사봉으로 향한다.

국사암은 쌍미륵사 삼거리를 지나 국사봉 중턱을 향하여 한참동안 어렵게 올라가야한다. 아주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 만들어 놓았기에 중간에 차량이라도 만나면 교행 할일이 걱정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진입한다. 외딴 산길을 따라서 약 1km정도 올라가니, 국사암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보였다.

여기서 부터는 길이 아주 가파르게 나있어서 자동차 엔진의 소음이 커지기 시작한다. 조금 올라서니 몇대의 주차공간이 있기에 국사암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니 아주 높은 산위에 아득히 보인다. 그러나 이곳부터는 아주 경사가 심해서 위험하기 때문에 차량진입금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그래도 4륜구동의 RV차 자존심이 있기에 멈출 수 없었다. 기어를 최하단으로 낮추고 급경사를 오르니 엔진음이 요란하게 들리면서 한참을 올라간다. 아마 중간쯤에 엔진이 스톱된다면 차량이 뒤집어 질듯한 경사였다. 약100여미터의 경사로가 왜그리 멀기만 했던지 절앞에 올라서니 마음이 놓인다.

국사봉 아래 가파른 산위에는 국사암이라는 작은 절이 바위 틈새를 비집고 앉아 있었다. 이곳에 지어진 국사암은 최근년에 지어진듯 비교적 법당들이 깨긋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그럼 궁예미륵은 어디에 있을까? 법당 오른쪽 옆으로 국사봉의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세 개의 아담한 미륵이 있었다.

▲ 국사봉 중턱에 자리한 국사암 표지석

▲ 입구에서 보이는 국사암의 전경

▲ 입구에서 보이는 국사암의 전경

▲ 국사암 극락전

▲ 국사암 대웅전

▲ 대웅전 우측에 자연석을 조각한 조형물

▲ 대웅전 우측으로 멀리 보이는 궁예미륵

궁예미륵은 미륵이라기보다 석인상에 걸맞을 정도로 몸의 전체적인 비례에 비해 모자가 거대하고 손 모양도 수인이 아니라 선비들이 합장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목도 지나치게 짧으며 얼굴의 윤곽에는 불상이 주는 이미지나 친근미가 나타나 있지 않으며, 석불의 발목 이하는 땅에 매몰되어 있다.

▲ 대웅전 우측의 궁예미륵(향토유적 42호)

지상에 노출된 본존의 높이는 320cm이고, 3단의 원형보개를 육계부분에 끼워 놓았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서 손가락을 안으로 모으고, 왼손은 배에 대고 손가락을 쫙 펴고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양팔에 도식적인 주름을 새기고 있다.

궁예미륵은 하반신에 U자형으로 주름에 있는 것으로 봐서 군의를 가슴 부위에서 묶은 것으로 보는데, 허벅지 위에 커다란 연화문을 새겨놓았다. 우협시보살과 좌협시보살 역시 둥근 보개를 쓰고, 본존과 동일한 표현자세를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간작고, 들고 있는 지물 육화장과 합이 다를 뿐이다. 

▲ 궁예미륵 우측에 자연석을 조각한 좌불상


이 석조삼존 입상은 조각수법이나 형태를 보아 조선후기나 근대에 미륵신앙의 유행과 더불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정식명칭이 국사암 석조여래입상인 궁예미륵은 안성의 미륵 중에서도 가장 조형미가 떨어지지만 궁예미륵이라고 불리는 걸 보면 뭔가 우리가 알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

안성에 이처럼 많은 미륵이 생긴 원인은 무었일까? 사학자들의 추측은 충청, 전라, 경상 삼남에서 서울로 올라갈때 합쳐지는 길목이던 안성은 예로부터 번성해 고을이 컸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지배층의 수탈이나 오랜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던 민초들이 자기구원의 수단일수도 있다.

지배계층에서는 더 강력한 지배력으로 왕을 꿈꾸며 스스로 미륵불의 현신임을 내세워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을 때도 자의든 타의든 안성지역에서 미륵신앙은 더 크고 깊게 나타났던 게 아니겠냐는 의견이다. 하지만 뚜렷한 근거자료가 없는한 추측에 불과할뿐 많은 미스테리를 남길뿐이다.

글쓴이는 궁예미륵을 만나기 위해 국사봉까지 찾아 갔지만, 국사암이나 궁예미륵의 역사를 들을 수 없었다. 귀가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궁예미륵의 자료를 찾아봐도 향토유적이란 자료밖에 없었다. 이처럼 뚜렷한 역사적 근거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영원히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임은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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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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