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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은 1545년 한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그곳에서 보냈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이순신의 집안은 대대로 문관 관직을 지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참변을 당한 일 때문에, 그의 아버지 이정은 백면서생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충무공은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직책을 거쳤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전라좌수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충무공은 일본인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노량·당포·한산도 등 여러 곳에서 적을 무찌르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노량해전에서 가슴에 적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이순신장군은 남해안에서 많은 전투를 통해서 세운공이 많음으로 지금도 남해안에는, 공의 전적을 기리는 많은 비각이 있으며 봉사하는 곳으로 여수의 충민사, 해남의 충무사, 남해와 통영의 충열사와 그가 청소년시절 가족들과 함께 머물던 옛집이있는 아산의 현충사 등이 있다.

이순신장군의 묘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 소재지에서 표지판을 보고 음봉초등학교 옆으로 300m쯤 가면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 길은 아산온천길이고, 묘소는 똑바로 직진하면된다.

도로변에는 이충무공 묘역임을 알려주는 표지판과 함께 입구에는 1693년(숙종 19년)에 건립되었다는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보인다. 

거북위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창조하여 남해 각처에서 적을 무찔러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겨레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묘소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충무공 신도비 왼쪽에는 이인좌의 난으로 술절한 충무공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가있다. 신도비의 뒤쪽에는 이봉상의 묘가 있었으나 영인면 아산리로 이장하고 신도비만 남아있다.

신도비를 돌아보고나서 약 300m 떨어진 이순신 장군의 묘를 답사하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순신장군 묘역을 제대로 알기위해 전체 조감도가 그려진 안내도를 살펴보았다.

안내도 바로 옆에는 약수터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통을 가지고 물을 받고 있었으며, 약수물 뒤쪽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은 장군의 제사때 사용하는 제기 보관실이라고 한다.

이곳 입구에 주차를 하고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묘역 관리사무소가 있다. 매주 화요일은 휴관이라고 한다.

우거진 숲속으로는 깔끔하게 깔아놓은 보도블럭을 밝으면서 잠시 올라가니 커다란 홍살문이 보인다.

잠시동안 우거진 숲을 감상하며 올라서니, 이충무공묘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문을 잠시 읽어보고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작은 연못이 있으며, 물위에는 연잎이 떠있고,물속에는 비단잉어들이 노니는 풍경이 아름답다.

연못에 떠있는 눈부신 하얀색 연꽃이 유난히 눈에 띄이기에 한장 찍어 보았다.

입구에서 안쪽으로 바라보이는 묘역은 입구에 비석이 보이고, 깨끗하게 잘 자란 잔디밭이 길게 이어지고 노송들이 울창한 숲의 앞쪽으로 이 충무공 묘가 보인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후 고향인 아산으로 안장한 것은 그 다음해인 1599년이었다. 처음에는 이곳이 아닌 아산군 금성산에 모셨다가 16년 후인 1614년에 이곳 어라산으로 옮겼다한다.


충무공 묘 앞에는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의 비각이 있다.

신도비는 1794년 세워져 묘소 앞 비각 안에 있는데 이는 정조 '어제이충무공신도비'가 있는데 이는 정조 대왕이 직접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2품 이상 관직자의 무덤 또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서 공의 공덕을 치하해 정조대왕이 친히 비명을 지어 세운 '어제신도비'라한다.

묘비는 숭정기원후삼병신이월 일추각립(崇禎紀元後三丙申二月 日追刻立)으로 써있다.

묘소 주위에는 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는 상석과 혼이 놀다간다는 혼유석·향로석이 있으며, 동자상 1쌍·망주석 1쌍·석상 1쌍·문인석 1쌍·광명등·묘비석이 배치되어있다. 

이순신장군의 업적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릴때부터 위인전기에서도 많이 읽어서 널리 알려져 있을것이다.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전투는 노량해전에서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함께 1598년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왼쪽가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한다.

그는 54살의 나이에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죽
으면서도 나라에 대한 충절로 죽음을 맞이했던것이다. 이순신장군의 묘역에서 답사를 하면서, 거북선 거느리고 왜군을 향하여 호령하던 용맹스런 그의 모습과, 마지막으로 최후를 맞으면서 남긴말. "나의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이말이 아직도 아련하게 귓전을 맴도는듯했다.

유익한 정보라고 생각하시면, view on을 꾸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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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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