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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읍 능현리 명성황후의 생가를 돌아보고나면 그 옆에 민가마을이 있고 조금 떨어진곳에 감고당이라는 조선시대 한옥이 깔끔하게 단장되어있다. 본래 감고당은 서울 안국동에 있던 집으로, 시대는 다르지만 인현왕후가 폐위 후 5년 동안 머물던 곳이며, 명성황후는 생가에서 부친인 민치록이 돌아가시고나서, 아홉 살 때부터 왕비로 책봉될 때까지 감고당에서 살았다한다. 

본래 감고당은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명성황후는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16세의 나이에 이곳에서 왕비로 책봉된다.

고종에게는 ‘사랑받는 아내보다 정치적인 반려자’로 기억되었던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여성이기도 했던 명성황후. 생가터의 성역화사업으로 감고당은 쌍문동을 거쳐 결국 명성황후 생가 옆으로 이전 복원하여 최근에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감고당은 조선왕실의 위엄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전체적인 규모가 웅장하며, 감고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을 기준으로 행낭채 건물이 길다랗게 보인다.

 감고당으로 출입하는 대문 옆쪽으로도  대형 포스트가 좌우로 걸려 있어서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숨결을 느낄수 있다는 분위기를 주고있다.

 ▲  대문을 기준으로 밖에서 길게 보이던 행랑채 우측 건물의 내부 모습

▲  대문을 기준으로 밖에서 길게 보이던 행랑채 좌측 건물의 내부 모습


행낭채는 대문 가까이에서 신분이 가장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면서, 집안에 필요한 각종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던 짚풀공예품들도 여러점 보인다.


▲  행낭채 내부에 각종 농사도구와 최신식 새끼꼬는 기계


▲  "명성황후의 숨결을 찾아서"라는 행사의 홍보포스터


▲  행낭채에서 머슴들이 하던 가마니치는 틀


▲  밭갈이하는 쟁기와 소의 입을 가리는 망


행낭채에 들어서면 마당이 널찍하게 보이고 맞은편으로는 안채로 들어가기전에 또하나의 대문을 통과하는 중문채이며, 우측으로는 사랑채가 있다.


중문채는 안채의 부속건물이라 할수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 여성을 주거공간인 안채를 보호하고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다.


사랑채는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머물수 있는 곳으로 행낭채와 중문사이에 있으며, 대청, 사랑방, 누마루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사랑채 큰방에는 남자주인의 위엄이 돋보이던 한발이나 되는 담뱃대도 보인다.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채 앞쪽에 있는 중문채 대문을 통과해야만 안채로 들어갈수있다.


▲  중문채 통과후 보이는 'ㄷ'자 모양의 안채


▲  중문채에서 물레를 돌리는 아낙


▲  중문채에 기거하는 중간계층 신분의 방


▲  안채의 안방에 있는 명성황후의 초상화


▲  명성황후가 사용하던 안방의 모습

▲ 안채에 딸린 부엌에서 맷돌질하는 아낙

그럼 여기서 감고당에 관련된 조선시대 역사를 되돌아보자. 감고당은 조선 왕조에서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황후가 장희빈과의 갈등 속에서 왕비에서 물러난 뒤 이후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명성황후가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후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한다.

이 건물이 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황후를 기려 "감고당"이란 편액을 하사한 후부터라한다. 감고당은 본래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쌍문동으로 옮기게 되었고 재개발 문제로 또 다시 명성황후 생가옆으로 이전 건축하였다.

감고당은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구조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서 역사적인 보존 가치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수차레 수리하고 이전하면서 본래의 모습이 조금은 변형되었지만, 역사적인 인물을 배출한 건물을 잘 보존하면서 후세들이, 그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체험의 공간으로 관리되고 있어서 호평을 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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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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