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우리가 학창시절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윤봉길은 상해 홍구공원에서 개최한 일제의 천장절 겸 전승기념 축하식장에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여 상해 거류 일본인 민단장과 사령관을 죽이고 수뇌급 수명에게 중상을 입힘으로서, 우리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세계 만방에 과시한 분이다.
 
예산에는 일제시대 독립 투사인 윤봉길의사가 태어나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농촌계몽과 애국정신을 고취한 곳으로, 4.29 의거와 애국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충의사가 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의 애국충정을 기념하는 매헌 문화제가 열리며 윤의사의 귀중한 유품은 기념관에 전시되어 보물 제 568호로 보호되고 있다.

윤봉길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나서, 11세때에는 덕산 보통 학교에 입학했다가 그이듬해 인 12세때 일제의 식민지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스스로 자퇴했다고 한다. 19세 나이에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하자,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져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윤의사는 1930년 23세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충의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으며, 덕숭산 수덕사 가는 길목의 도로변에 인접해 있어서 그곳을  지나가다보면 거대한 홍살문이 눈에 띄인다.


가파른 돌계단길을 올라서면 홍살문이 있고, 앞쪽에는 사당 들어가는 대문인 충의문을 통과하면 윤봉길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충의사가 있다.


충의사에는 윤봉길의사의 생전 모습을 그린 영정사진이 있으며, 화가 정우성님이 그렸다고한다.


윤봉길의사 사적비는 충의사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서 기념관 방향으로 걷다보면, 커다란 거북이 등에 매헌 윤봉길의사 사적비가 보인다.


윤봉길의사 기념관은 현대식 건축양식에 한옥기와로 전통미를 가미시켜 427평의 기념관을 건립하고 최첨단 기법인 영상복합모형으로 세계적인 전시 연출로 역사의 산교육장화 하였다.



윤봉길의사 기념관 - 일대기를 볼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설


윤봉길의사 기념관 - 보물로 지정된 유품들


윤봉길의사 기념관 - 보물로 지정된 유품들


윤봉길의사 기념관 - 윤의사가 책을 읽는 모습


윤봉길의사 기념관 - 출생과 성장배경


윤봉길의사 기념관 - 망명과정과 편지


윤봉길의사 기념관 - 망명에서 환국까지


윤봉길의사 기념관 - 추모사업


윤봉길의사 기념관 - 도시락과 물병 폭탄


윤봉길의사 기념관 - 윤봉길의사와 김구선생


윤봉길의사 어록탑은 독립운동사에서 그 공훈이 천추에 빛나는 윤봉길의사의 주옥같은 어록을 담아 후세에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웅장한 어록탑을 2000년 6월 21일 월진회에서 건립하였다.


윤봉길의사는 나이 25때인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개최한 일제의 천장절 겸 전승기념 축하식장에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여 폭파하고나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일본 대판 위술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그택형무소 교외 삼소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25세 일기로 순국했다.

이곳 충의사는 윤의사의 영정을 모신 본전지역, 윤의사께서 태어나서 4세때까지 살던 생가(광현당)지역, 그리고 4세때 이사하여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인 23세때까지 살던 성장가(저한당)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도로를 기준으로 좌우로 광범위하며, 충의사 본전지역과 생가지역이 나누어져 있어서 생가지역은 별도로 소개할 예정이다.

윤봉길의사는 비록 25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그의 숭고한 독립투사의 얼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에 마련된 매직비젼 등 복합 영상모형으로 연출되어 이해를 돕고 있다. 이처럼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을 기리고,
역사의 현장을 잘 가꾸고 다듬어 후세에 널리 알리는 일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시대적 요청에도 부응하는 일이라 생각해본다.

 

유익하게 보셨나요?^^ 손가락 모양 클릭하면 추천됩니다.



반응형

Posted by 털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