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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딸아이의 25주년 생일날이었습니다.

각자 직장생활에 바쁘다보니 몇 개월 만에 네식구가 오랫만에 외식 하고, 케이크를 자르며 딸아이의 생일을 축하해주었습니다. 누구나 생일에는 이런 행사를 하겠지만, 우리 딸만은 누구보다도 특별한 생일입니다.

딸아이가 태어나던 날 부모 된 입장에서 평생 잊지 못할 마음 아픈 사연이 있었기에, 그때를 생각하면 콧등이 시큰하고 눈물이 핑 돕니다. 지금부터 25년 전 딸아이는 가난한 부모의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직장생활 하면서 몇년간 모아둔 돈으로 시골에서 사업을 한다고 거액을 투자했다가 실패하여 많은 부채까지 떠안고 집안에는 당장 먹을 식량  조차 없을 때 태어났습니다.

소도시의 산부인과에서 그것도 8개월 만에 조산하여 체중이 1.8kg이라는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젊은 부모는 첫아이의 출산에 기쁨은 사라지고 얼떨결에 딸아이의 출산을 지켜보다가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어쩔 줄 몰라서 답답한 심정에 의사를 붙잡고 물어보고, 간호사를 보고 물어 봅니다.

" 우리아기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나요?" 

그러나 당시 의사는 자신이 없다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 일단 인큐베이터에 한 달 정도 넣어보고 이야기 합시다." " 그럼 하루에 병원비가 얼마나 듭니까?" 이렇게 물어보니까 하루에 3만원씩 들어간다고 합니다. 
 


당시 3만원이라면 지금의 30만원이 넘는 수준인데 당장 먹고 살아갈 식량도 없는 형편에 하루에 3만원 소리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합니다. "그럼 인큐베이터에 넣으면 우리아기 살 수 있습니까?"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기들의 상태에 따라서 최선을 다해볼 뿐입니다."

이렇게 병원에서 몇 시간을 서성대며 고심을 했습니다. 우리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넣어서 살릴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사채라도 내서 어떻게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보장 못한다니.......... 20대의 젊은 부모입장이지만 어차피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할 입장 이였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눈물을 머금고 결심을 했습니다.

"인명재천"이란 옛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더군요. "우리아기 집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의사는 아무런 반응 없이 승낙해주더군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주먹만 한 핏덩이를 포대기로 감싸고 택시를 불러서 80리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시골집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시골집은 흙으로 지은 집이라 정월달 추위에 방안에도 살얼음이 얼던 시절입니다.

연탄불  아궁이 아랫목에 포대기로 둘둘 감아서 얼굴만 보이게 해놓고 이불로 주변을 감싸서 보온을 시켜두고 하루 종일 상태를 지켜볼 뿐입니다. 아기는 꼼짝도 않고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있더군요.

이렇게 초조하게 지켜보는 젊은 부부의 마음은 오죽할까요. "우리아기 살 수 있을까?"
아내는 팅팅 부은 몸으로 몸조리보다 아기의 생사를 걱정하면서 훌쩍훌쩍 울면서 이렇게 물어보면, "인명은 재천이라는데............이런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더군요.

아내는 매일같이  아기를 들여다보며 훌쩍훌쩍 울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혹시나 젖을 먹을 수 있나 물려 보았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아기에게 젖을 물려보려고 애쓰던 보람이 있었는지 이틀이 지나고 3일째 되는 날 이였습니다.

"저기요. 우리아기가 젖을 빨아요?" 아내가 건넌방에서 울음썩인 목소리로 외칩니다.

"어디어디, 정말이야?"  후다닥 달려가니, 손바닥위에 올려진 조그마한 아기가 힘차게 젖을 빨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아기가 입을 오물거리면서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딸아이는 작은 체구지만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듯이 힘차게 젖을 빨면서 힘을 길렀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지났지만, 늘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이 아기를 지켜보면서 반신반의 합니다.


"정말 우리아기가 기적처럼 살아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느 정도 지나니까 환경에 적응도 하고, 하루하루 성장하기 시작해서 체중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마음조이며 아기를 돌보면서 조금씩 불안감은 잊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어서 누구에게도 아기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마음조이며 살아온 날들이 벌써 100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아기가 태어난지 100일 만에 몸무게가 드디어 4kg 가까이 성장했습니다. 그제야 처갓집과 가까운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간단하게 백일상을  차려서 축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출생신고도 못했던 일을 100일이 지나서야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아기는 생사가 불분명하게 100일을 가슴조이며 정성을 들이고 나서야 드디어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 후 아기를 데리고 예방접종 하려고 출산했던 산부인과를 찾아가서 당시의 1.8kg로 태어난 미숙아가 이렇게 컸다고 하자, 모두들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더군요. 어떻게 이렇게 키웠냐고 인터뷰 하듯이 여기저기서 질문이 한참을 쏟아 졌지요.

"이건 분명히 기적이야." 당시 담당 간호사가 아기를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 

그후 딸아이는 조금 성장이 늦기는 했지만 첫돌을 지나면서 정상적으로 성장하였고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이렇게 미숙아로 태어나서 부모의 애간장을 녹이며 성장한 딸아이가 그래도 자라면서, 아파서 병원한번 안가고 자라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딸아이는 태어나면서 부모 애간장 태우던 심정을 보답이라도 하듯이 자라는 동안 특별히 말썽을 부리거나 반항한번 없이 잘 자라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으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걸 혼자서 잘 해결하고 학교 다닐 때 공부하라고 잔소리한번 안하고 수월하게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벌써 딸아이는 26살의 성인으로서 직장생활 열심히 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생활을 개척하고 있지만, 아직도 어린애처럼 생각이 드는 것은 부모의 보호본능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남들보다 특별한 탄생의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도 없을 겁니다.

지금도 딸아이를 보면 참으로 대견스럽다는 생각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년 생일날만 되면, 출생후 100일 지나도록 생사가 불분명해서 마음 조이던 아픈 기억이 떠올라 콧등이 시큰하고 눈물이 핑 돌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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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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