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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시암의 유래 ~

영시암이 지어진 때는 조선 숙종때이다. 서인과 동인의 대립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절정에 달해 있을때이다. 숙종 15년, 숙종의 정비 인현왕후 민씨는 왕자가 없었고 총애를 받던 후궁 가운데서  숙빈장씨가 먼저 왕자를 낳았다. 숙종은 그 아이를 세자로 삼을 작정이였는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반대할것을 짐작하고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세자 책봉의 문제가 나타나자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반대의 상소를 올렸다. 당시 숙종의 나이는 29세 민비의 나이는 23세이니 후궁에서 낳은 아이를 세자로 책봉하는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남인은 숙종의 의견에 찬성했고, 숙종은 남인의 힘을 업고 서인들을 숙청하고 남인의 정권을 형성케했다. 그때 숙청된 사람중에 전 영의정 김수항이 있었다.

영의정 김수함은 세자를 가르치는 문제가 급하지, 책봉하는 것은 급하지 않다고......이에 김수항, 송시열을 귀향 보냈다가 그해 3월에 김수항의 관직을 박탈하고 윤 3월에 사사하였다. 이때 김수항의 아들 상연 김창흡은 세상의 인연을 끊고 설악산에 암자를 지어 산수를 즐기고 영원히 세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여 "영시"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영시암의 창건자는~

김창흡의 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 호는 삼연. 영의정 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부모의 명령으로 응시했고 현종14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김석주의 추천으로 장악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다.

그는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생활을 했고, 영조가 세제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외딴 섬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도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삼연집〉·〈심양일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영시암의 창건자인 김창흠은 매월당 김시습과 쌍벽을 이룰만큼 문재가 뛰어난 사람으로 같이 살던 하녀가 호랑이에 물려갔는데 그후 혼자 살던 김창흡이 나이가 들어 떠났다 한다. 이후 영시암은 기호스님이 중수하였으나 일제때 화재로 소실되었던 자리에 근래에 암자의 보수 중창하기에 이르렀고 최근에도 한창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영시암은 내설악의 관문인 백담사로부터 약 3.5km 의 거리에 있으며, 오르거나 내려가거나 소요시간은 동일하게 약 1시간 30분정도 걸린다. 수렴동 계곡을끼고 완만한 길이므로 누구나 비교적 수월하게 오를 수 있으며, 등산로 옆으로 수렴동계곡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거닐다보면 언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영시암이 눈앞에 다가선다.

영시암에서는는 오세암이 약 2.5km 이며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정도고, 계속해서 수렴동 대피소까지는 약 1.2km의 거리에 소요시간은 20분정도 걸린다. 수렴동대피소에서 봉정암까지는 4.1km로 3시간 20분이 더 소요된다. 대부분 등산객들은 백담사, 영시암, 오세암, 봉정암을 기준으로 등산시간을 설정하거나 안내표지판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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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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