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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은 충북 청주와 충주가 만나는 중부 내륙의 길목이어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태평미륵이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매산리 비봉산에는 죽주산성이 있다. 죽주산성은 신라 때 내성을 쌓고, 고려 때 외성을 쌓았다.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는 본성은 1.7㎞이고, 외성 1.5㎞, 내성 270m로 세겹의 석성이 보전되고있다.

죽주산성의 송문주장군 이야기가 특별하게 전해오는 곳이다. 고려 고종 23년 몽고군이 죽주산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자 죽주방호 별감 송문주 장군이 15일 동안을 싸워 적을 물리쳤다. 장군은 일찍이 귀주성싸움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알고 있어 대비하여, 전쟁에서 대승하였음으로 백성들이 그를 가르켜서 '신명' 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을 보수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진을 치기도 하였다. 현재 성의 둘레는 1688m, 높이는 2.5m 정도이며 부분적으로 수리를 많이 하였다. 남쪽 성벽의 양쪽 끝과 동쪽 성벽의 북쪽 끝에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치성이 남아 있다.

또한 죽주산성은 특히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다. 왜군에게 내주고 말았던 죽주산성을 황진 장군이 기습작전으로 탈환에 성공하자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을 넘보지 못했다. 산정에 올라서면 안성벌, 이천ㆍ장호원이 한눈에 조망된다.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남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 전략적인 요새지역이였다.


일죽 IC에서 안성 방면으로 38국도를 따라 1.7㎞가면 제 2죽산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 용인방면 17번국도로 오르면 길 왼쪽에 미륵당 마을이 나오며 500m 위로 죽주산성 입구가 나온다.


국도변에서 안내표지판을 따라 가파른 시멘트 포장 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면, 산성입구에서 8부능선까지 가면 주차장이 있고 바로 옆에 아담한 절집이 하나 보인다.


가파른 보도블록 산길을 따라서 50m쯤 올라가면 죽주산성의 주 관문인 동문을 통과해서 산성일주를 시작한다.


성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조금 걸으면 죽주산성 현황도가 있으며 산성길을 따라서 일주를 시작하면 된다.


죽주산성의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시계 반대방향으로 전체길이 1688m의 산성길을 따라서 일주를 시작했다.


죽주산성의 외성을 따라서 일주하면서 안쪽으로 보면 나즈막하게 보이는 내성도 길게 늘어져 보인다.


아늑한 산성위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을 밟으며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보면 높은 산정에 치성이 남아있다.


산정의 높은곳에서는 일죽면 지역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날씨가 맑으면 멀리까지 조망 할 수 있어서 좋을것같다.


좌우로 울창한 송림길을 따라 산성길을 걷노라면 중간중간에 아담한 성문터 흔적들도 몇군데 보인다. 


죽주산성을 답사면서 막연하게 걷는것 보다는 자연속에서 많은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면서 이곳에서 명성이 알려진 송문주장군과 관련된 흥미있는 설화를 상상하면서 걷는것도 또 하나의 재미일것이다. 옛날 옛적에........


송문주 장군은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커서 행동이 범상치 않았다. 이에 어머니가 송장군을 너무 총애하자 누이 송희는 질투와 시기를 하여 동생을 죽이고 자기가 성공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하루는 다음과 같은 내기를 하였다.
송문주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끌고 개성에 갔다가 다음날 아침밥 먹기전에 돌아오고, 송희는 밤부터 성을 쌓기로 하되 지는 사람이 죽기로 약속을 하였다.


송문주는 개성을 향하여 떠나고, 그 다음날 어머니가 아침밥을 짓다가 보니 송희는 벌써 성을다 쌓고 성의 남문을 달 때인데, 개성에 간 송문주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송문주의 천
성이 한번 약속한 일은 목숨을 내놓고라도 실현하고야 마는 까닭에 만일 내기에 지는 때는 죽음으로써 맹약을 어기지 아니할 것이지만, 송희는 여자라서 진다고 할지라도 죽지는 못하리라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들이
만일을 잘못될것을 염려하여 준비해 둔 뜨거운 팥죽을 가지고 송희를 찾아가 먹고 하라고 권하였다. 송희는 끝난 후에 먹겠다고 재삼 고사하다가 배가 고프던차에 어머니의 강권을 막지 못하고 팥죽을 받아먹고 성문을 달려고 할 즈음 송문주가 돌아왔다. 송희는 그제서야 어머니에게 속은것을 알았으나, 지는 사람이 죽기로 약속되었으므로 여장부로서 송희는 칼을 빼어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그 목에서 선혈과 함께 푸른 새 한 쌍이 나와서 이상한 비명을 내고 날아갔는데, 송장군이 몽고병에게 패하기 3
일전에도 진문 앞에 푸른 새 한 쌍이 날아와 송희가 죽을 당시 날아갈때 낸 소리와 똑같은 비명을 내고 날아갔다. 그후 송장군은 몽고군에 패하기도했다. 후인들이 말하기를 송희의 원혼 때문에 진 것이라 하며 남문이 없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죽주산성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보다는 산성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보는 맛이 일품이다.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와 침엽수들이 길동무를 해주어 상쾌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 69호로 지정되어 있는 죽주산성의 내성 곁에는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의 넋을 기리는 충의사라는 제실이 있으며 매년 가을에는 장군의 업적과 넋을 기리는 제례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죽주산성은 산성길 자체만으로는 비교적 경사도가 원만하고 길이도 1.7km 남짓하기 때문에 가족단위로 가볍게 1시간정도면 답사 할 수 있다. 비록 수백년의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성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최근년들어 많은 부분이 새롭게 복원되어 옛맛은 덜 하더라도 그나마 선인들의 슬기를 느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직까지는 봄바람이 차갑게 느껴지지만, 멀지않아 죽주산성에 녹음이 짙어지면 신록의 자연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며 산성길을 걸어보자. 주변에 우거진 소나무에 뿜어내는 신선한 솔향기를 마시며, 수 많은 세월 목숨걸고 죽주산성을 지켜온 송문주 장군의 업적을 기려보자. 수백년 모진 세월을 유유히 지켜온 죽주산성의 이끼 낀 바위들은 역사를 말해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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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털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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