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죽산에서 봉업사지와 죽산리 사지를 만날 수 있었다. 보는 견해에 따라서는 죽산리 사지의 경우 두 개의 절터로 추정하여 석불입상과 그 옆의 석탑을 한 개의 사지로 보고, 3층석탑에 또 하나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봉업사는 언제 창건되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매곡리 폐사지' 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6년 경지정리작업시 출토된 유물에서 이곳이 봉업사였음을 말해주는 명문이 발견되어 비로소 봉업사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절의 명칭이 중요한 이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하는 '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셨던 비봉산 아래의 봉업사'가 바로 이곳임을 밝혀주는 것으로, 사찰의 중요성이 증명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조의 진영을 모셨다는 것은 이곳이 진전사원이었다는 의미인데 진전사원이란 왕실의 의지에 따라 죽은 왕의 진영을 모시고 위업을 기리며 명복을 비는 사찰로 태조의 진전사원은 전국의 이름난 사찰(개성의 봉은사, 논산 개태사 등)에 두었던 것으로 보아 봉업사가 결코 만만한 사찰이 아님을 밝혀주는 것이다.
현재 봉업사지에는 5층석탑과 당간지주가 남아있고, 죽산리 사지에서는 3층석탑과 석불입상이 남아있다.
봉업사지 당간지주는 경기유형문화재 제89호 지정되어 있으며, 죽산리 5층석탑에서 약 30m 떨어진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간지주 사이로 보이는 5층석탑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다. 이 당간지주는 오래 전에 왼쪽의 당간지주가 밭 가운데 도괴되어 있었던 것을 1968년 5층 석탑 복원공사 때에 현재 위치에 바로 세웠다한다.
당간지주는 양지주가 동서향으로 대치해 있으며 아무런 조각이 없고 윗부분 안쪽에 구멍을 뚫어 간을 장치한 흔적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방치되어 지주 한쪽이 매몰되었던 탓인지 기반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당간지주는 둔중한 느낌을 주며 아무런 조식도 없고 확실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초 봉업사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간지주의 크기는 높이 4.7m, 가로 0.76m, 세로 0.5m 이다
봉업사지에 있는 죽산리 5층석탑은 보물 제435호 관리되고 있으며, 보물의 위용을 자랑하듯이 안성지역에는 많은 석탑들이 산재해 있으나 그 중에서도 죽산리 5층석탑이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죽산리 오층석탑은 고려중기 이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6m로 여러장의 크고 넓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단층 기단을 두고 위에 5층 탑신을 올렸다. 석재 결구에서 균형을 잃지않은 거대한 작품으로 주목되고 있다.
특히 5층 석탑은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늠름한 탑으로 고려 초기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옥개석 받침이 층마다 정연하게 5단씩이며, 석재 결구에서 균형을 잃지 않은 거대한 작품으로 웅장함에 시선이 주목된다.
봉업사는 고려시대 창건되었고,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빈터에 남아있는 딱딱한 화강암만 관찰하다가, 주변에 노랗게 물든 산수유꽃이 만발한것을 보니 그나마 좀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죽산리 3층석탑은 경기유형문화재 제78호로 관리되고 있으며, 5층 석탑과 그 앞의 당간지주가 있는 위치에서 직선거리로 수십미터 떨어진 밭가운데 동그마니 석탑1기가 서있다. 아마 이곳도 고려 때 이 곳에 사찰이 있었으며 같은 경내에 설치되었던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지대석의 크기는 가로 227m, 세로 22m이다.
석탑의 모형은 단층기단위에 세워진 방형의 3층 석탑으로, 1층 옥신은 기단중석보다도 높이가 약간 낮고 높이에 비해 폭은 좁고 우주형이 얕게 모각되었다. 그리고 2층 이상의 옥신은 1층에 비해 체감률이 급격히 줄고 위층으로 갈수록 심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다. 또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후기로 추정된다.
봉업사란 말 그대로 나라를 창업하면서 받들던 절이란 뜻이며, 고려 창업을 기념한 국사찰이었으며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고려가 망하기전 475년동안 고려왕실에서 한해도 빠짐없이 선왕에 대한 예를 올렸던 기록이 있다. 지금은 황량한 빈터에 5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서 있지만 그 당당한 위용에서 한 시절의 영광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968년 복원공사 때는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삼층석탑은 밭 한가운데 서 있는데 기단 면석아래는 땅에 묻혀 온전한 모습을 알기 어렵고, 혜소국사와 연관이 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을 사람들은 석불과 삼층석탑을 기자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듯 하니, 근거리의 태평미륵과 함께 곳곳이 기자신앙의 흔적인 셈이다.
사실 문화재 답사란 외로운 길이다. 혼자서 전국의 산이며, 들판이며, 이리저리 휘젖고 다니면서, 천년의 세월을 견디어 온 화강암들과 대화를 나누고 역사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나마 죽산리 3층석탑을 답사하는데, 이웃동네 사는 황구가 밭 가운데까지 마중 나와 반겨주어서 좀 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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